"공기업 경쟁체제 유지 또는 통합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는 종합의견을 도출하였다."
지난해 말 국토교통부는 다소 어정쩡한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내놨습니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와 수서고속철도(SRT) 운영사인 SR의 경쟁체제에 대한 평가 결과였는데요. 두 철도 공기업의 경쟁 체제를 이대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두 기관을 통합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논의의 결론입니다.
국토부는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했는데요. 지난 2020년 초부터 발생한 코로나19로 인해 경쟁 체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된 기간이 짧아 분석하기 어려웠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현재의 경쟁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철도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건강한 경쟁을 유도해 나가겠다는 겁니다. ▶관련 기사: 코레일·SR, 통합 안한다…원희룡 "경쟁이 기본 방향"(12월 20일)
이처럼 정책 추진 방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면서 현행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는데요. 하지만 이후 철도 업계 분위기는 이런 태도와는 사뭇 다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변화의 움직임이 되레 빨라지는 모습입니다.
SR은 새해 초부터 사실상 '독립' 선언을 했고요. 국회에서는 코레일의 기능을 축소하는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국내 철도 산업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걸까요.
SR은 독립선언…철도산업법 개정안 발의도
이종국 SR 대표이사는 지난 5일 수서역에서 '평택통복터널 전차선 단전 SRT 운행 차질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했는데요. 앞서 지난달 30일 수서고속선 남산 분기부~지제역 구간(약 3㎞) 상행선에서 전차선의 전기 공급이 중단돼 167개 고속열차가 10~130분간 지연돼 승객들이 큰 불편을 겪은 것에 대한 입장을 내놓은 겁니다.
이 대표는 이날 "통복터널 전차선 단전사고의 원인은 부실한 자제사용과 공사과정에 대한 허술한 관리로 발생했다"며 "자체 조사결과 하자보수 과정에서 겨울용이 아닌 여름용 접착제를 사용한 것이 확인됐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에 철저한 조사와 철도시설 유지보수체제 변화 등 강력한 재발방지책을 촉구한다고 언급했습니다.
특히 이 대표는 코레일과 체결한 위탁계약을 전면 재검토하고 독자 예약발매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는데요. 현재 SR은 위탁계약을 통해 차량정비와 예·발매시스템 등을 코레일에 맡기고 있습니다. 결국 앞으로는 독자적인 운영으로 코레일에서 '독립'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에 대해 코레일은 즉각 반박 자료를 냈습니다. 현재 사고 원인 조사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고의 원인과 유지 보수 체제의 개선 등에 대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를 지냈던 조응천 의원은 코레일 외에 다른 기관 등이 철도 유지보수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철도산업발전기본법'(철산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개정안은 단순한데요. 현행법의 '시설유지보수 시행 업무는 철도공사에 위탁한다'라는 문장 하나를 삭제하겠다는 겁니다.
정부 역시 이와 관련해 오는 6월 '철도안전체계 심층진단 및 개선방안 연구용역' 결과를 내놓을 예정인데요. 이 용역 결과에 따라 시설 유지 보수 기능은 물론 코레일에 위탁 중인 관제업무까지 대폭적인 변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코레일 기능 축소…국민 안전·편익 개선될까
SR의 '독립' 계획과 조응천 의원의 발의 법안이 실현되면 국내 철도 산업의 판은 확 바뀌게 됩니다. 특히 기존 코레일의 기능이 대폭 축소하게 되는데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간 국내 철도산업은 큰 틀에서 두 번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애초에는 철도청이 철도 건설과 운영을 독자적으로 하는 체제였는데요. 이를 철도시설은 국가가 건설·소유하고, 운영은 별도 운영사가 하도록 구조 개혁을 했습니다. 바로 상하분리인데요. 이에 따라 국가철도공단과 코레일을 각각 설립했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철도시설의 유지보수는 철도 운영자가 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국가철도공단이 이를 코레일에 위탁했는데요. 당시 고속·광역·일반철도 운영사는 코레일이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지난 2013년 이뤄집니다. 철도 운영사로 코레일 외에 SR를 추가로 설립한 건데요. 이 과정에서 SR은 위탁계약을 통해 차량정비, 예발매시스템 등을 코레일에 맡겼습니다.
결국 코레일은 국가철도공단의 철도 시설 유지보수 기능은 물론 '경쟁사'인 SR의 차량 정비 등도 맡게 된 겁니다.
'상하 분리' 과정에서 코레일에 주어진 기능을 국가철도공단에 되돌리겠다는 게 조응천 의원의 발의 내용이고요. SR은 '경쟁 체제' 도입 과정에서 위탁했던 기능을 되돌리겠다는 겁니다.
지난해 크고 작은 열차 사고가 줄을 이었는데요. 이런 영향으로 철도 체계 개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는 분위기입니다. 과연 어떤 체계가 사고를 줄이고 국민의 편의를 높일 수 있을지 관건이 될 전망입니다.
일각에서는 지금의 복잡한 체계가 사고를 유발하고 국민들의 편익을 줄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반면 지금의 논의들이 각 기관의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현 체제 속에서도 충분한 개선이 가능하다는 의견입니다.
이런 움직임에 철도노조 등은 '민영화 움직임'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과거 '민영화 프레임'에 갇혀 철도산업 체계 개편에 어려움을 겪었던 정부는 조심스러운 모습이고요. 이런 기 싸움에 다시 어정쩡한 개편이 이뤄질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정부와 각 공공기관, 그리고 노조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