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서 사랑받고 있는 많은 제품들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그 한 끗 차이가 제품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비즈니스워치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에 숨겨져 있는 그 한 끗을 알아봤습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함께 찾아보시죠. [편집자]
이래서 만날 마중 갔구나, 만날 월드콘 먹으려고, 나도 줘!!
지난 2016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쌍문고 1학년 노을이는 동네 앞 둘리슈퍼에서 아버지인 성동일 한일은행 대리를 거의 매일 마중 갑니다. 퇴근길마다 아버지가 다른 가족 몰래 노을이에게 '월드콘'을 사줬던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노을이의 누나 덕선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월드콘이 그때에도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후 30여 년이 지났지만 월드콘은 여전히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아이와 부모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아이스크림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어릴 적 월드콘을 먹은 추억 하나쯤은 다 있으니까요. 그래서 세대마다 월드콘을 기억하는 법도 다릅니다.
60대인 저희 부모님은 채시라와 심형래를 떠올리고요. 어느덧 30대가 된 저는 월드컵의 열기가 생각납니다. 요즘 아이들은 페이커를 보면서 월드콘을 떠올릴 겁니다. 이처럼 월드콘은 시대마다 옷을 바꿔입으며 늘 우리와 함께였습니다. 월드콘이 이토록 장수할 수 있었던 힘은 아마도 마케팅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라보콘 이긴 '비법'
1986년 롯데제과가 출시한 월드콘은 아이스크림 시장을 크게 바꿔놓습니다. 아이스크림 시장에서도 드디어 '경쟁다운 경쟁'이 펼쳐지기 시작한 겁니다. 품질뿐만 아니라 마케팅 경쟁이 본격화한 계기였습니다. 당시 아이스크림콘 시장은 1970년 해태가 출시한 부라보콘이 꽉 잡고 있었습니다. 후발주자인 월드콘에겐 큰 벽이었죠. 부라보콘은 월드콘보다 먼저 TV광고를 활용해 입지를 굳힌 상태였습니다. 때마침 신문·라디오·TV·영화 등 '매스 미디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막강한 1위 업체가 있는 시장은 특별한 광고를 내놓기 어렵습니다. 확실한 마케팅 포인트가 없다면 '아류'소리를 듣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이스크림콘은 대중에게 익숙지 않았습니다. '부라보콘=아이스크림콘'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죠. 부라보콘의 브랜드 파워는 그만큼 막강했습니다. 1976년에 등장한 '12시에 만나요 부라보콘~'이란 CM송은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처럼 월드콘의 시작은 쉽지 않았습니다. 부라보콘을 이길 마케팅 전략이 절실했습니다.
롯데제과는 '모험'을 선택합니다. 월드콘을 출시하면서 공격적인 TV광고를 진행합니다. 당시 떠오르고 있던 매스 미디어를 십분 활용한 전략이었죠. 모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코미디언 심형래 씨와 하이틴 스타 채시라 씨를 발탁합니다. 이상아 씨도 있었네요. '뭐니 뭐니 해도 맛있는 게 좋은 거죠~'로 시작하는 CM송은 당시 스타 가수 전영록 씨가 불렀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TV 광고를 타고 월드콘의 인지도는 단번에 높아지게 됩니다.
월드콘과 부라보콘의 광고 콘셉트는 조금 달랐습니다. '12시에 만나요~'로 시작되는 부라보콘의 CM송은 통기타로 대변되는 포크음악이었습니다. 중독성 있는 잔잔한 멜로디가 대표적입니다. 반면 월드콘 광고는 락 멜로디에 가깝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맛있는~' CM송을 듣다 보면 샤우팅을 하게 됩니다. 이는 포크송에서 락으로 바뀌던 시대상을 반영한 겁니다. 롯데제과는 월드콘 '젊고 활기찬'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영리한 선택이었습니다. 부라보콘과의 '차별화'에 성공한 거죠.
내재된 스포츠 'DNA'
월드콘은 높아진 인지도를 바탕으로 롯데제과의 간판 제품이 됩니다. 출시 2년 만에 부라보콘의 아성을 뛰어넘습니다. 물론 이를 두고 롯데제과와 해태제과는 입장 차이를 보입니다. 롯데제과는 1988년에 부라보콘의 매출을 추월했다고 말합니다. 반면 해태제과는 1992년에서야 역전이 됐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찌 됐던 중요한 사실은 월드콘이 부라보콘을 '이겼다'는 겁니다.
월드콘의 적극적인 스포츠 마케팅도 성공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젊고 활기찬 월드콘과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렸죠. 월드컵 등 세계적인 스포츠 이벤트를 활용한 독창적인 광고를 선보였습니다. 박주영, 이근호 등 당대 최고 인기 축구 스타를 모델로 발탁했습니다.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이미지의 스포츠 스타 모델 활용은 30년을 넘긴 장수 제품인 월드콘에 신선함과 젊은 이미지를 불어넣었습니다. 그 덕에 스포츠는 월드콘을 상징하는 DNA로 자리잡습니다.
특히 2006년 독일 월드컵,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때는 '월드콘 먹고, 월드컵 보러 가자'는 이벤트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이런 스포츠 마케팅에 힘입어 월드콘은 월드컵(2010, 2014), 올림픽(2012, 2016) 등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 때 유독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른 해에 비해 판매량이 높게 나타나기도 했죠. 실제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월드콘 매출은 610억원으로 전년 대비 20%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2010년과 2014년에도 매출이 늘었습니다.
월드콘의 스포츠 마케팅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난 2020년에는 프로게이머 페이커(이상혁)를 광고모델로 발탁해 화제가 됐습니다. 페이커(이상혁)는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 세계 챔피언 출신입니다. 10~20대 사이에서 '영웅'으로 불립니다. 아이스크림의 주요 소비층이죠. 롯데제과는 식품업계에서 누구보다 먼저 페이커의 가능성을 알아본 겁니다. 지난해에는 '배구여제' 김연경을 광고 모델로 발탁해 효과를 톡톡히 봤습니다. 월드콘에 배구라는 이미지를 덧입힌 것도 큰 성과였습니다.
트렌드를 '입다'
물론 위기도 있었습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비자들의 입맛이 더욱 다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커피나 베이커리 등 다른 먹거리도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아이스크림 시장을 위협했습니다. 월드콘도 이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특히 경쟁사의 '미투 제품'의 영향력도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외국 제품도 늘었습니다. 변화가 필요할 때면 과거의 역사가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동안의 정체성을 잃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때 다시 마케팅의 힘이 발휘됩니다. 물론 품질적인 변화가 밑바탕이 됐기에 가능했습니다. 월드콘은 다양한 토핑으로 차별화를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광고 스타일에도 변화를 줍니다. 제품의 브랜드를 강조하던 기존 전략이 '원물'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광고 전면에 우유와 고급 토핑이 쏟아지는 모습을 부각했습니다. 물론 월드콘 특유의 '페스티벌' 감성은 유지하면서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2010년 히트를 친 월드콘 와퍼가 있습니다. 아이스크림 가운데 6㎝ 크기의 통웨이퍼와 호두칩을 넣은 것이 특징이었죠. 광고는 이를 적극적으로 부각했습니다. 축구 경기장에서 초코 와플들이 날아와 월드콘에 꽂히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관중들은 이를 보고 환호합니다. 당시 이 광고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의 선전과 함께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차별화된 품질을 적절한 시기에 친숙한 마케팅으로 풀어낸 선례로 꼽힙니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월드콘은 '왕좌'를 수성할 수 있었습니다.
월드콘은 더 젊은 상품으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헤이즐넛 △무화과 △유자 △체리베리 △바나나 △모카크림 등 새로운 제품을 선보여 왔습니다. 물론 일부 제품을 제외하곤 존속 주기가 짧습니다. 소비자 입맛이 계속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떤 해에는 바닐라가 더 잘 팔리고, 다음 해에는 초코가 인기인 것처럼 말입니다. 중요한 점은 월드콘이 트렌드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겁니다.
월드콘은 대표 장수 브랜드입니다. 어느 세대가 모여도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상품입니다. 항상 시대 변화를 읽어내며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월드콘의 아이덴티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이죠. 아마 이것이 월드콘이 34년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일 겁니다. 앞으로 월드콘은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요. 윤재권 롯데제과 마케팅 팀장에게 직접 들어봤습니다.
"자전거 타는 것 같았던 월드콘 마케팅"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롯데제과 마케팅실에서 아이스크림 브랜드를 담당하고 있는 팀장 윤재권입니다. 롯데제과에서 25년간 일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는 셀레임, 와플 등의 상품을 론칭하기도 했습니다.
-월드콘은 1986년 출시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월드콘이 긴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월드콘을 마케팅한다는 것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전거라도 페달을 안 밟아주면 쓰러집니다. 마케팅은 자전거의 페달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지에서는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잘 달립니다. 하지만 오르막에서는 페달을 힘차게 밟아줘야 합니다. 제품의 품질 개선과 함께 이뤄진 TV 광고 등 최근의 ESG 마케팅들이 그런 일환이었죠. 이처럼 월드콘은 그 시대의 니즈에 맞게 변신해 왔습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소비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월드콘을 마케팅하는 데에도 시대적인 흐름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첫 출시때부터 심형래씨와 채시라씨를 통해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진행했습니다. '젊고. 페스티벌'한 느낌이 잘 살았던 TV 광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는 이를 활용한 스포츠 마케팅을 펼쳐나가는 것이 주효했습니다. 월드컵 등과 함께 성과가 따랐습니다. 이후에는 엑소 등 아이돌을 모델로 발탁했습니다. 항상 젊은 층의 관심사가 포인트였습니다. 최근에는 가치소비가 화두입니다. 열대우림동맹(RA) 인증 바닐라빈을 사용한 바닐라를 사용하는 등 ESG 마케팅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최근 진행한 마케팅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에피소드라기보다 지난해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김연경 선수를 모델로 쓰면서 관련 굿즈를 8월 15일까지 제공하는 이벤트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6~8월 비가 많이 오면서 수요 예측이 빗나갔습니다. 그래서 재고가 쌓일 뻔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오히려 경영진에 비용 투자를 더 권해 9월까지 행사를 연장시켰습니다. 오히려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안 좋았던 시선들이 좋게 바뀌면서 직장생활의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광고 모델과 얽힌 재미있는 추억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모델이 광고를 촬영할 때 현장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활기찬 월드콘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텐션을 조금 올려주시라"고 말씀드릴 때도 있습니다. 최근에 기억나는 분은 페이커 선수입니다. 회사 윗분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페이커 선수를 모릅니다. 제가 봉준호 감독과 함께 '대한민국 5대 국보'로 꼽힌 분이라고 계속 설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월드콘이 점유율 1위를 이어가고 있지만 아이스크림 시장이 과거보다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월드콘의 미래 전략에 대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국내 아이스크림 시장은 늘어나는 시장이 아닙니다. 거기서 '유지와 확장' 미션을 맡은 입장에서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소비자의 맛의 기준은 더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프리미엄과 함께 가성비도 갖춰야 합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기성 제품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새로운 가치'를 담는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으로 시니어층이 늘어날 텐데, 이들도 즐길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겁니다. 당분 등 수치를 낮춘 제품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긴 역사와 큰 매출을 가진 상품의 마케팅을 담당한다는 것은 그만큼 부담감이 큰 일일 것 같습니다.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주말에 맛집 등 일명 '핫 플레이스'를 둘러보러 갑니다. 걷거나 사람 구경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죠. 이 과정에서 얻는 인사이트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니까요. 물론 업무의 연장선으로 보일 만합니다. 하지만 마케팅 업무를 하다 보면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마케팅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월드콘은 "한 마디로 ㅇㅇ다"를 간단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월드 클라스'입니다. 해외에서도 인기가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저에게는 '행운'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제품과 함께 일할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직장인으로서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보람된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월드콘을 만난 것은 제게 행운입니다.
☞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