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유통]은 한주간 유통·식음료 업계에서 있었던 주요 이슈들을 쉽고 재미있게 정리해 드리는 콘텐츠입니다. 뉴스 뒤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사건들과 미처 기사로 풀어내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편집자]
큰 바람 일고
11월의 마지막 주, 유통업계의 맏형 롯데그룹이 임원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최근 롯데그룹은 그야말로 태풍이 불어닥치는 중인데요. 롯데케미칼에서 시작된 유동성 위기가 그룹 전체로 퍼져나가며 안정성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경제 이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롯데가 어떻게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눌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인사인 만큼 예년처럼 평온하게 순리대로 흘러가긴 어려웠을 겁니다. 그간 보지 못했던 대규모 인사가 있었죠. 롯데는 이번 인사에서 전체 CEO의 36%인 21명을 교체했습니다. 임원도 무려 22%를 퇴임시켰습니다. 신규 임원 인사도 있었지만 퇴임한 임원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랍니다. 결과적으로 전체 임원이 13%나 줄어드는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특히 이 사태의 원흉(?)인 화학 부문은 그야말로 '전멸'입니다. 지난해 인사에서 롯데 화학군과 롯데케미칼 대표를 겸임하며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새로운 오른팔로 낙점됐던 이훈기 사장을 비롯한 10명의 CEO가 옷을 벗고 물러났습니다. 임원진 역시 30%에 달하는 임원들이 퇴임했고 60대 이상 임원은 80%가 물러났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를 강조한 인사였습니다.
호텔 사업부도 '필벌'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호텔롯데에 소속된 롯데호텔·롯데면세점·롯데월드 대표가 전부 바뀌게 됐습니다. 지난해 990억원 흑자전환했던 실적이 올해 3분기 기준 다시 285억 적자전환하는 등 실적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칼바람을 피해간 건 식품·유통군 정도입니다. 화학군을 재정비하는 동안 식품·유통군이 버티고 있으라는 의미겠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필벌' 원칙에 따른 인사였지만 누군가는 또 승진을 합니다. 퇴임한 CEO의 자리에 새로 올라가는 임원들도 있구요. 자리를 옮겨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CEO들도 있습니다. 특히 롯데그룹은 이번 인사에서 70년대생 CEO가 대거 등장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무려 12명의 70년대생 CEO가 나왔는데요.
이번에 새로 선임된 70년대생 CEO 중 윤원주 롯데중앙연구소장·김승욱 롯데벤처스 대표·김해철 롯데베르살리스엘라스토머스 대표 등 3명이 나란히 1974년생으로 최연소입니다. 만 나이로 딱 50입니다. 최근 유통업계에 40대 대표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앞서 인사를 단행한 CJ그룹에서는 1990년생 CEO가 탄생한 것과 비교해 보면 '젊은 인재'라기엔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하지만 역시 눈에 띄는 건 '초고속 승진'이 이어지고 있는 오너 3세겠죠. 이번 인사에서 신동빈 회장의 장남인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은 부사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지난해 전무로 승진한 지 1년 만입니다.
고속 승진은 이번 인사 때만이 아닙니다. 신 부사장은 지난 2020년 일본 롯데에 부장으로 입사했는데요. 입사 1년 반 만인 2022년 롯데케미칼 상무보로 승진하고 그 해 연말에 상무로 '1년 2회 승진'을 달성합니다. 지난해 인사 때는 전무로 승진했고요. 이번에 또 한 차례 승진하면서 입사 4년 만에 4번의 승진을 경험하는 'KTX급' 인사를 맛보게 됩니다.
롯데그룹 측은 신 부사장의 승진에 대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과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을 겸임하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신사업 및 신기술 기회 발굴과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 추진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왔다"고 밝혔는데요. 재미있는 건, 신 부사장이 활약한 롯데지주와 롯데바이오로직스는 모두 이번 인사에서 수장이 교체됐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책임은 아랫사람만 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물론 오너 3세가 그룹 경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건 어색하지만 수십명의 CEO와 임원들이 그룹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옷을 벗는 상황에서 오너의 자녀만 승진하는 것도 그 이상으로 어색하다는 지적입니다.
롯데를 지켜라
아무튼 부사장으로 승진한 '후계자'에겐 그만큼 더 큰 책임이 뒤따르게 될 겁니다. 신동빈 회장은 1955년생으로 내년이면 만으로 70세가 됩니다. 본격적으로 후계자의 경영 승계를 준비해야 할 나이입니다. 신 부사장의 고속 승진에도 이유는 있었던 셈입니다.
실제로 신 부사장은 지난 10월 이름을 바꿔 문을 연 롯데 타임빌라스 수원의 그랜드 오픈에 참석했습니다. 유통·식품군에서 일한 적이 없는 신 부사장이 유통 계열사의 행사에 얼굴을 비춘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주 전무가 아닌 '그룹의 후계자'로 방문한 셈입니다.
지난 6월엔 롯데지주 주식 약 1억9500만원어치를 매입한 데 이어 9월에도 1억원어치를 추가 매입했습니다. 지분율은 0.01%로 미미하지만 이 역시 신 부사장이 '책임경영'을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역시 '성과'입니다. 그룹의 승계라는 건 단순히 부모가 자식에게 가게를 물려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롯데그룹은 자산 130조원의 재계서열 6위 그룹입니다. 직간접 고용인원이 20만명에 달합니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신 부사장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신사업과 글로벌 사업을 진두지휘할 계획입니다. 바이오CDMO 등 신사업의 성공적 안착과 핵심사업의 글로벌 시장 개척을 주도,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쌓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위기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신유열의 경영 시계는 지금부터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