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의 발견]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소재들을 다룹니다. 먹고 입고 거주하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해 그 뒷이야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보려 합니다. [생활의 발견]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여러분들은 어느새 인싸가 돼 있으실 겁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편집자]
배 안 아픈 우유
요즘은 초등학교 우유 급식이 자율로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먹고 싶은 우유나 요거트류를 직접 고를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어릴 적에는 학교에서 2교시가 끝날 즈음 흰 우유를 한 개씩 나눠줬었습니다. 저는 흰 우유보다는 초코 우유나 딸기 우유가 먹고 싶었지만 그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무조건 흰 우유였죠.

그래서 네스퀵 등 우유에 타 먹는 가루가 유행했습니다. 지금은 동서식품의 제티가 '1티어'라고 하는데,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땐 제티가 출시되지 않았었습니다. 미국산 네스퀵이 유일한 선택지였죠. 차가운 우유라 잘 녹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네스퀵 한 봉지면 우유 마시는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저는 흰 우유가 맛이 없어서 네스퀵으로 해결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흰 우유만 먹으면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던 친구들입니다. 우유만 먹으면 배탈을 하는 게 '장이 약해서'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락타아제(lactase)'가 부족해서였다는 게 알려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맘 편히 우유 한 잔 마실 수 없게 하는 이 락타아제라는 놈은 대체 뭘까요.
유당, 누구냐 넌
락타아제는 우유에 들어 있는 유당(젖당)을 분해하는 효소인데요. 유당이 분해되지 않고 장 내에 남으면 복부팽만, 설사 등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전세계인의 75%, 한국인의 80%가 유당불내증이라고도 합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성인은 우유를 마실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유당불내증이라는 단어가 익숙해 각 사마다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락토프리' 우유를 내놓지만 그때는 "매일 먹으면 장이 튼튼해져서 괜찮다"는 논리로 계속 흰 우유를 먹어야만 했죠. 실제로 우유를 자주 마시면 분해 능력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락토프리 우유가 처음 등장한 건 딱 20년 전인 2005년입니다. 흰우유 시장 1위 브랜드인 서울우유가 '편안한 우유 락토프리'를 내놨고요. 매일유업도 곧바로 '소화가 잘 되는 우유(소잘우유)'를 출시합니다. 매일유업의 소잘우유는 이후 락토프리 우유 시장을 선도하며 40% 이상의 점유율로 지금까지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국내 락토프리 우유 시장 규모는 첫 제품 출시 10년 후인 2016년까지만 해도 100억원에 미치지 못했는데요. 2023년엔 약 870억원까지 늘었습니다. 락토프리 우유의 효과가 알려지며 우유를 멀리하던 사람들이 락토프리 우유를 찾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락토프리 우유 소비자는 기존 흰우유 소비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상 '신시장'인 셈입니다. 업계에선 향후 락토프리 우유가 전체 흰우유 시장의 10%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거를까 분해할까
락토프리 우유를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이젠 어떤 락토프리 우유를 마실 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매일유업과 서울우유뿐만 아니라 남양유업, 동원F&B 등 다른 유업계 경쟁자들도 잇따라 비슷한 이름의 락토프리 우유를 내놨습니다. 이름도 비슷비슷합니다. 남양유업은 맛있는우유GT 브랜드를 통해 '소화 잘 되는 배 안아픈 우유'와 '슈퍼제로 락토프리'를 내놓고 있고요. 동원F&B는 '덴마크 소화가 잘 되는 우유 락토프리'를 판매 중입니다.
단순히 제조사를 보고 고를 수도 있겠지만 락토프리 우유를 만드는 공법에 따라 고를 수도 있습니다. 유업체들이 일반 흰우유를 락토프리 우유로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매일유업이 사용하는 이중필터 방식과 대부분의 다른 유업체들이 사용하는 효소 첨가 방식입니다.

매일유업은 울트라필터와 나노필터를 이용해 유당을 걸러내는 락토프리 공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미세 여과기인 울트라필터에 우유 원액을 통과 시킨 후 필터의 크기가 0.002㎛이하인 나노필터를 이용해 우유 속에서 유당만을 제거하는 공법입니다.
매일유업에 따르면 이렇게 필터를 이용해 유당을 제거하면 우유 본연의 고소한 맛과 영양을 그대로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 우유 속 유당을 제거하기 위해 효소를 첨가하게 되면 첨가된 효소에 의해 유당이 포도당과 갈락토오스로 분리되면서 고소한 맛이 줄어들고 단맛이 강해진다는 설명입니다.

유당분해효소를 사용하는 기업들의 입장은 또 다릅니다. 유당분해효소 첨가 방식의 경우 다른 유익한 영양소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필터를 사용하면 유당 외 다른 성분이 함께 걸러질 수 있지만 유당분해효소를 쓰면 손실되는 영양분이 없다는 거죠.
또 이 공법은 카페라떼 등 커피나 빵류와 먹을 때 오히려 더 풍미가 좋아진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카페나 베이커리 등에서 락토프리 우유를 사용할 때 필터 방식이 아닌 효소 첨가 방식을 적용한 락토프리 우유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제 대형마트에 가서 락토프리 우유를 구매할 때 제조사를 볼 지, 제조 공법에 따른 차이점을 확인할 지 조금은 생각이 많아지겠죠? 흰 우유라면 다 비슷할 줄 알았는데 공법에 따라 맛이 다르다니 조금 놀라운 일인데요. 디카페인 커피가 일반 커피와 맛이 확연히 다르다는 걸 생각하면 또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우유의 맛과 풍미, 영양분을 모두 지키면서도 배는 아프지 않은 '완벽한 우유'가 나올까요? 유업계의 활약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