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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대 금융의 길]2만명 야외시험 '비하인드 스토리'

  • 2020.06.02(화) 16:09

[비즈니스워치 창간 7주년 기획 시리즈]
"생계달린 시험 더는 미룰수 없어 판단"
"응시생 질문에 감독관은 100m 달리기"
이은혁 손해보험협회 자율관리부장 인터뷰

전세계를 덮친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한국은 세계 여러나라가 부러워 할 만큼 성공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질병관리본부, 의료진, 일선 공무원뿐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헌신이 깔려있다. 경제의 혈맥을 관리하는 금융기관의 노력도 조명받을 만하다. 금융시스템이 건재했기에 영세상인·중소기업에 대한 차질없는 자금공급이 이뤄질 수 있었다. 금융기관의 알려지지 않은 노력을 재조명한다. [편집자]

지난 4월25일 서울 성북구 서경대학교 운동장에서 ‘손해보험 설계사 자격시험’ 응시자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앉아 시험을 치르고 있다.

바람이 유난히 차고 강했던 4월25일 토요일. 서울 성북구 서경대학교 운동장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5미터 간격으로 캠핑용 간이 책걸상 100개가 놓였고 그 위에서 수험생들이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하늘이 보이는 야외에서 널찍이 앉아 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마치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연상케 했다. 서경대 한 곳에 그치지 않았다. 넓은 야외가 있는 곳이라면 대학이든 연수원이든, 놀이동산이든 드넓은 시험장으로 변신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가져온 낯선 풍경에 외신도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K-방역'의 우수함을 확인할 기회이자 바이러스 확산 속에서도 한국사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기 때문이다. 2만명이 응시한 보험설계사 시험에서 단 한 명의 감염자도 나오지 않았다.

대규모 야외시험이 시행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시험업무를 담당한 이은혁 손해보험협회 자율관리부장(사진)을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설계사 야외시험을 무사히 치른 이은혁 손해보험협회 자율관리부 부장이 시험준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야외시험은 설계사 시험 역사상 첫 시도였고 어려웠던 만큼 보람도 컸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웃음)"

이 부장은 시험 준비와 시험 당일을 떠올리며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앞서 지난 3월 남해지방해양경찰청은 의무경찰 선발시험을 야외에서 실시했다. 운동장에 텐트 5동을 설치해 사전 방역을 실시하고 면접시간을 분산시켜 응시생 간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약 한달 뒤에는 안산도시공사가 안산시에 위치한 축구장에서 필기시험을 진행했다.

이같은 사례를 참고해 손해보험협회 내부에서도 야외시험 논의가 이뤄졌다. 그렇지만 곧 묻혔다. 앞선 시험들과는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해양경찰 선발시험은 53명 모집에 총 210명이 지원해 치러졌다. 안산도시공사 필기시험은 139명의 응시자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많아야 200명 남짓이다. 그러나 설계사 시험은 이보다 100배 더 많다. 전국에서 총 2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험을 치른다. 만에 하나 방역에 구멍이 생길 경우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부장은 "시험이 중단된 초기부터 야외시험 가능성 논의가 있었지만 워낙 응시자수가 많다보니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야외시험을 제외한 다른 방안들을 논의했다"고 했다.

보험설계사는 국가공인자격시험이다. 생보사와 손보사, 독립보험대리점(GA) 등에 소속된 예비 설계사들이 회사를 통해 협회에 시험등록을 하고 협회가 금융위원회로부터 권한을 위탁받아 시험을 진행한다. 월 6회에서 많게는 8~9회 시험을 치르는데 2월 중순부터 시험이 중단되면서 협회로 시험재개 요청이 쇄도했다.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왔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시험을 재개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대구에서 코로나가 급격하게 번지면서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국면에 맞닥뜨렸다.

▲야외시험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이후에는 섭외가 문제였다. 장소 빌려주기를 꺼려 말 그대로 섭외전쟁이 벌어졌다. 이은혁 부장이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 부장은 "100명 수용이 가능한 시험장이라고 하면 20~30명씩 나눠서 시험을 보는 것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는데 일단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감염위험을 피할 수 없는 만큼 논의 진척이 쉽지 않았다"며 "그래서 온라인시험에 대한 전방위적인 논의와 점검이 이뤄졌고 당국과도 아이디어와 기술적 방법들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온라인시험은 시험과정에서 부정행위를 완벽히 차단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부정행위 방지할 수 있는 기술적 준비가 이뤄지지 않으면 시행이 어렵다는 결론이 났다.

2월 중순에 시험이 멈춘 후 4월에 접어들자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됐다. 설계사 시험은 이를 준비하는 응시생들의 생계가 달린 문제다.

이 부장은 "4월에도 시험이 재개되지 않을 경우 5월에 시험을 본다고 해도 실수입은 6월이 돼야 나오기 때문에 설계사 시험만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4개월간 수입이 발생하지 않게 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며 "시험이 실시되는 며칠차이로 급여가 한 달 차이날 수 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서둘러 야외시험이라는 처방을 내리게 됐다"고 했다.

당국 승인을 받아 야외시험이 결정되자 이후부터는 섭외전쟁이었다. 시험담당자들 외에도 자율관리부 소속 3개팀 전원이 장소섭외에 뛰어들었다.

이 부장은 "생보쪽까지 합하면 이틀사이 2만명이 넘는 규모의 시험이 치러지는 만큼 전국 각지에서 시험준비를 위한 대관, 책걸상 준비, 방역업체 섭외 등으로 정신없이 바빴다"며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공설운동장이나 학교들이 다 외부 대관을 멈춘 상태라 장소섭외가 어려웠다"고 했다.

감염위험 때문에 대관을 잘 해주지 않는 상황이라 서울·경기·수원지역에 있는 모든 학교시설에 전화를 돌렸다. 앞서 야외시험을 치른 곳에도 연락했지만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각 지역본부에선 지역 내 넓은 장소가 있는 곳에는 모두 전화를 돌렸다. 다행히 주요 대학과 기업 연수원, 리조트, 크루즈 터미널, 관광지 공터 등이 시험장으로 섭외됐다.

성공적인 시험시행의 이면에는 당국의 빠른 대처와 적극적인 움직임도 한몫했다. 금융위는 시험시작 3일전까지 접수된 설계사시험 신청자명단을 넘겨받아 질병관리본부에 전달, 자가격리자가 신청인 중 포함돼 있는지 선별작업을 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손보협회 시험 신청자중 한 명이 자가격리자 명단에 포함돼 있는 걸 확인했다. 금융위원장을 비롯한 금융당국 간부들도 시험실시 전까지 회의를 열고 상황을 검토하며 최종 시험개시 여부를 타진했다.

그러나 준비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시험당일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책걸상이 바람에 날아가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생명보험협회도 야외시험을 진행했다. 사진은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삼성생명 휴먼센터에서 시험을 앞두고 방역작업을 하는 모습이다.

이 부장은 "바람이 정말 심한 시험장에서는 응시생이 시험 후 자리를 비우면 책걸상을 뒤집어 놓고 다음 응시생이 오기 전까지 방역 후 다시 원래대로 놓으면서 진행했다"며 "오전 9시반에 시작해 오후 6시까지 5번의 시험이 치러지는 동안 책걸상 뒤집기만 왕복 1000번 가량이 이뤄진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책상간 거리가 5미터 간격으로 놓여있어서 앞과 뒤에서 응시자가 손을 들거나 질문을 하면 왕복 100미터 거리를 뛰어다녀야 했다"며 "조금 지나고 나서야 감독관들을 중간중간 배치해 동선을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험당일 감독관 및 업무지원을 위해 협회 직원 절반인 50명 가량이 동원돼 힘을 보탰다. 보험사들도 시험진행을 돕기 위한 인력 70명을 지원했다.

이 부장은 시험 당시를 회상하며 "생경한 풍경 속에서 코로나시대를 거쳐가는 하나의 역사적 현장에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특히 "대규모 야외시험이 짧은 준비기간을 거쳐 사고없이 이뤄졌다는 것은 금융당국과 업계, 그리고 무엇보다 설계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이해로 가능했다"며 "준비기간이 굉장히 힘들었고 시험당시에는 추위 등으로 불만도 있었지만 대부분 적극적으로 방역관련 통제에 따라줬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현재 협회는 야외시험뿐 아니라 온라인으로 시험을 진행하는 방안을 다시 검토 중이다. 수그러드는듯 했던 코로나19 감염자가 다시 늘면서 대안을 찾을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 부장은 "온라인시험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으며 당국과도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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