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를 덮친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한국은 세계 여러나라가 부러워 할 만큼 성공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질병관리본부, 의료진, 일선 공무원뿐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헌신이 깔려있다. 경제의 혈맥을 관리하는 금융기관의 노력도 조명받을 만하다. 금융시스템이 건재했기에 영세상인,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자금공급이 이뤄질 수 있었다. 금융기관의 알려지지 않은 노력을 조명한다. [편집자]
어렵게 잡은 인터뷰가 뻔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주 앉은 인터뷰이 3명이 "열정과 패기만 있다면 문제없다"라는 식의 대답을 반복했다. 언제 스트레스를 받냐는 질문에 "원래 스트레스받는 걸 즐기는 스타일"이라니.
이달 초 페퍼저축은행이 사내 비정규직 직원 34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당 직원을 인터뷰해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면 코로나19에 따른 충격으로 불안감이 팽배한 고용시장에 작은 희망을 전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인터뷰를 요청한 뒤 몇번의 조율 과정을 거쳐 일정을 확정했다. 지난 11일 오후 6시 회사 측이 섭외한 직원 3명 그리고 회사 홍보담당인 김종선 이사와 직원이 경기도 분당 본사 회의실로 들어섰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원이 자리 한켠을 지키고 있는데 갓 정규직이 된 직원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라고 하는 게 어불성설이었을까. 인터뷰 중 속으로 '망했다'라고 수없이 중얼거렸다.
"면접 마지막에 우리 아이 이름 대고 펑펑 울었어요"
분위기가 바뀐 건 인터뷰를 시작하고 40여 분이 지나면서다. 모범답안이라고 생각했던 대답이 진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토금융본부의 박경은 대리의 "영업 압박을 받아야 주말에 푹 쉬고, 그게 원동력이 돼서 다시 일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애착을 갖게 된 이유'를 물었다.
박 대리는 올 초 페퍼저축은행에 입사했다. 이달 초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원 34명 중 한 명이다. 10여 년간 파견직에서 계약직까지 여러 형태로 금융회사만 다섯 곳을 거쳤지만, 매번 정규직 전환에 미끄러졌다. 그간 업무 경험을 인정받아 대리가 됐다.
"전 직장에서 아기를 갖고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았는데 혼자 눈치를 봤던 것 같아요. 그때도 계약직이었거든요. 곧 출산해야 하는데 어떡해야 하지. 다행히 출산 후 연락이 왔어요. 경은 씨 복귀해야지. 기뻐서 회사로 돌아갔는데…"
회사는 박 대리의 처지를 이유로 업무 내용을 바꾸고 처우도 낮추면서 무기계약직 전환 가능성을 당근으로 내걸었다. "업무적으로 자존심이 상했어요. 늘 해오던 일인데 네가 왜 이 업무를 하려고 하느냐는 식으로 나오니까 너무 억울했어요."
그런 박 대리의 귀에 페퍼저축은행 소식이 들려왔다. 본인 능력만 있으면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다고 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고개를 숙여야 하는 보수적 이미지도 덜 하다고 했다. 그는 틈틈이 기회를 엿봤고, 가까스로 면접 기회를 잡았다.
"면접장에서 펑펑 울었어요. 면접 마지막에 우리 아이 이름을 댔지 뭐예요. 과거에 아무 생각 없이 살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이 엄마니까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열정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면접에서 왜 울었을까, 걱정돼서 집에서 또 울었어요."
그렇게 문턱을 넘었지만 코로나19가 덮치면서 희망이 사라지는듯했다. "있던 직원도 잘리는 마당에 비정규직 직원을 끌어줄 거라 기대하기 힘들었다", "같은 팀 차장님과 나이가 같아 껄끄러울 것"이란 걱정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나면 다시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지난 4월 말 인사본부에서 메일이 도착했다. 정규직 전환 소식이었다. "그날 저녁 제 남편이 '이제 일을 그만두고 아기를 키우겠다'라고 깔깔 웃었다"면서 박 대리는 가슴 벅찼던 당시를 떠올렸다.
바로 이때부터 인터뷰가 풀리기 시작했다.
"정규직 채용은 회사가 책임진다는 의미"
인사본부에서 일하는 조다예 행원은 정규직 전환 소식을 다른 직원보다 조금 일찍 알았다. 조 행원은 줄곧 서비스업에 종사하다가 작년 6월 페퍼저축은행에 합류했다. 옆에 앉아 있던 박 대리가 조 행원의 '치아가 드러나는 환한 미소'를 칭찬했다.
"전무님이 비밀로 하고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다가 다른 분들이 좋아하시는 거 보고 그제서야 마음껏 좋아할 수 있었어요. 지나가는 분들이 박수도 쳐주고 너무 기뻤죠. 매년 늘어가는 직원을 보면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구나 생각해요."
페퍼저축은행은 2017년부터 매년 꾸준히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있다. 2017년 말 291명이던 임직원 수는 지난해 말 381명으로 90명 증가했다. '생활이 안정돼야 일이 손에 잡힌다'라는 장매튜 대표이사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라는 설명이다.
페퍼저축은행은 2013년 호주 페퍼그룹에 편입된 이후 수차례 증자를 거쳐 작년말 자산총액이 3조 3171억원에 이른다. 3년 전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불었다. 다만 올해 1분기엔 지난해 충당금 비용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바람에 순이익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주택금융본부에서 일하는 김지훈 행원은 대표이사의 기대대로 "안정성이 높아져 너무 좋다"라고 했다. 특히 대전에서 분당으로 올라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짐을 안 싸도 되는 게 가장 좋단다. 앞으로 함께 가게 된 회사인 만큼 더 많은 일을 맡고 싶고, 지금 일하는 부동산 분야 지식도 더 쌓고 싶다는 포부도 전했다.
"회사가 있는 분당 주변에 집을 알아보고 있어요. 나중에 돈을 벌어 서울로 옮기고 싶고요.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긴 한데, 여자친구가 워낙 프리해 서로 터치도 안 하고요(웃음). 계속 좋은 실적을 내면서 일하고 싶습니다."
이날 인터뷰에 응한 세 직원은 모두 사람을 우선하는 기업 문화가 맘에 든다고 입을 모았다. 함께 앉아있던 김종선 이사는 인터뷰 말미에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건 회사가 어떻게 해서든 이익을 내서 직원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의미"라면서 뜻깊은 한마디를 던졌다.
어떻게든 직원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든든한 회사. 코로나19 사태의 와중에 과감하게 정규직 전환을 결정하면서 회사가 느꼈을법한 책임감의 크기만큼 직원들의 로열티는 훨씬 더 쑥쑥 커지지 않을까. 페퍼저축은행의 정규직 전환 3총사를 보면서 치아가 드러나는 환한 미소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