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 기업이 앞장서 투자를 조기에 집행하고 계획보다 확대하는 것이 바로 대기업이 경제활성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겁니다."
2015년 8월17일 서울 중구 서린동 SK 본사. 사흘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최태원 SK 회장은 그룹의 핵심 경영진에게 이 같은 당부를 남겼다. 당시 SK그룹은 반도체 분야에 46조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최 회장은 약 1주일 뒤 열린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 반도체 신공장(M14) 준공식에선 "(M14 준공은) SK그룹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것뿐 아니라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를 다시 써 내려가는 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 최태원 SK 회장이 4일 충북 청주 신규 반도체 공장(M15) 준공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
그의 구상이 현실화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SK하이닉스는 4일 충청북도 청주에 또하나의 반도체 공장(M15)을 건설했다. 내년 상반기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하면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주도권을 더욱 확고히 틀어쥘 수 있게 된다.
현재 SK하이닉스는 D램 분야에서 세계 2위,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5위를 달리고 있다. 이번 신공장이 가동되면 SK하이닉스의 약점으로 거론되던 낸드플래시 분야의 경쟁력이 한층 강화된다.
앞서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이천 공장에 15조원을 들여 새 공장(M17)을 짓기로 결정했다. M16은 올해말 공사를 시작해 2020년 10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최 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나온지 5년간 SK하이닉스가 집행하는 투자금액만 50조원이 넘게 된다. 이날 준공한 M15도 당초 잡았던 투자액(15조원)을 훨씬 웃도는 금액(20조원)을 쏟아붓기로 했다. 서울대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앞으로 5년간 M15가 일으킬 고용창출 효과만 21만8000명에 달한다.
급변하는 반도체 경기 속에서 대규모 적자를 내던 회사가 이제는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된 셈이다.
SK그룹이 2011년 채권단 관리 하에 있던 하이닉스를 인수한 것도 최 회장의 결단이 아니었으면 이뤄지기 힘든 일이라는 게 중론이다. 당시 SK그룹 내부에선 매년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하고 시황마저 들쭉날쭉한 반도체 시장에서 하이닉스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SK하이닉스가 그룹 전체 영업이익의 약 70%를 책임지는 핵심 중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정유화학, 통신 등 내수업종에 치우졌던 SK그룹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출기업이 된 것도 SK하이닉스 덕분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한 승부수를 던진 오너의 결정이 그룹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최 회장에게 SK하이닉스는 선대 회장의 유지를 이어간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최 회장의 부친인 고(故) 최종현 회장은 1978년 선경반도체를 설립하며 일찌감치 반도체를 미래 먹거리로 낙점했다. 하지만 곧이어 불어닥친 2차 오일쇼크로 사업을 접었다. 30여년 뒤 SK하이닉스를 인수하며 최 회장은 "오랜 꿈을 실현했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꿈은 국경을 넘어 해외로도 향했다. 올해 6월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연합'은 세계 2위의 낸드 기업인 일본 도시바메모리 인수를 마무리 지었다. 도시바는 1984년 세계 처음으로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한 낸드의 원조다. 도시바 인수에 성공했다는 건 반도체 종주국의 지위가 한국으로 완전히 넘어왔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 충북 청주에서 열린 SK하이닉스 신공장(M15) 준공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김동연 경제부총리,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장관, 이시종 충청북도지사 등이 참석했다. |
이날 M15 준공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도 SK하이닉스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축구장 5개 규모의 웅장한 클린룸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향한 하이닉스의 꿈을 봤다"며 "회사에도 기업에도 나라에도 아주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반도체 산업은 한국 경제의 엔진"이라며 "SK하이닉스의 지속적 투자계획을 응원하며, 정부도 기업의 투자가 적기에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최 회장도 화답했다. 특히 반도체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가치 창출과 공유 인프라 제공, 사회적 기업 육성 등 SK그룹이 전사적으로 추진하는 활동을 더욱 강화할 방침을 밝혔다. 최 회장은 "경제적 가치만 만드는 기업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사회적 가치 창출로 지속가능한 성장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