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안팎으로 변화의 시기다. 다가오는 2020년은 올해보다 더 간단치 않은 사업 환경에 놓일 것이라는 예상이 짙다. 주요 대기업 내부에도 세계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를 헤쳐내야 할 대기업집단 총수들의 머릿속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준비하는 CEO들의 경영 판단과 생각의 방향을 주요 열쇳말로 추려 들여다봤다.[편집자]
#2019년 가을, 서울 중구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 1층
언젠가부터 이곳에선 딱딱하고 투박한 정장 차림의 직원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파스텔톤 니트나 캐쥬얼 셔츠, 면바지 혹은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직원들이 눈에 더 자주 띄인다. 날선 다리미 선의 정갈함은 사라졌지만, 분위기는 한결 더 편안하다.
한진그룹은 지난 9월부터 '복장 자율화'를 시행 중이다.
복장 자율화. 1980년대나 들어볼 법한 말이지만, 최근 후계경영이 막 시작된 몇몇 그룹 사이에선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젊어진 총수로의 세대교체를 알리기 위해선 사실 이만한 도구도 없다.
다만 한진그룹의 복장 자율화는 다소 의외다. 항공 업계 자체가 워낙 보수적이고 경직된 조직이지만, 그런 문화가 조성된 데는 '업계 큰형'인 대한항공의 몫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빳빳한 와이셔츠의 날선 다리미 선이 고객에 대한 예의이자, 서비스라고 여겨 온 이들에게 니트와 청바지 허용은 그야말로 파격에 가까운 변화다.
최근 한진그룹엔 이러한 변화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조원태 회장 체제가 들어선 이후 부터다.
수평적 조직 문화 구축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직원들의 처우다.
조 회장은 직원들의 옷 차림뿐만 아니라 점심시간과 휴가기간에도 자율을 부여했다. 왕복 비행 시간 축소 등 승무원들의 근무 여건을 대폭 개선했고, 이들의 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인천운영센터(IOC)도 현재 건립 중이다.
수평적 조직 문화도 확산 중이다. 일단 임원 회의부터 불필요한 의전과 격식이 사라졌다. 종이와 펜이 없어졌고, 오로지 프리토킹(Free-Talking)으로만 회의가 진행된다. 이 경우 더 많은 아이디어와 의견이 나오게 되고, 그만큼 의사결정도 빨라져 조 회장은 일주일에 한번씩 이런 식의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취임 8개월 차를 맞는 조원태호(號)는 이처럼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앞서 조 회장은 취임 후 열린 두 번의 기자 간담회에서 줄곧 '변화'를 외쳤다. 지난 6월 서울서 열린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연차 총회에서, 그리고 11월 뉴욕에서 가진 간담회에서 한진그룹의 변화를 강조했다.
항공업계가 어려운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과거의 틀과 사고 방식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이겨낼 수 없다는 게 그의 요즘 생각이다.
다행히 직원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불과 1년 전까지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전횡을 비판하며 '사퇴'를 외치던 직원들의 SNS 채팅방은 조 회장 취임 후 거의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후문이다.
수익성 강화
조 회장은 조직문화 외에 사업 구조나 경영 방향 등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고 있다. 당장 내년만 해도 불황이 불가피하고 신규 저비용항공사(LCC) 들의 진입으로, 이전보다 더 어려운 경영 환경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그는 사업 구조에 대한 변화의 첫걸음으로 '구조조정' 카드를 빼들었다. 불필요한 사업은 최대한 정리하고,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 위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지난 달 조직 개편을 통해 고위급 임원 20%를 줄였고, 현재는 대한항공 직원에 한해 희망퇴직을 진행 중이다. 인력 조정이 마무리되는 내년에는 비수익 계열사에 대한 구조조정도 본격화 될 전망이다.
조 회장은 지난 11월 미국 뉴욕 기자 간담회에서 "이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버려야 한다"며 비수익 계열사에 대한 구조조정 의사를 내비친 바 있다. 현재로선 항공 운송과 제작, 여행업과 호텔업 등이 정리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반면 대한항공 중심의 수익 구조 다변화 전략에는 속도를 낼 계획이다.
조 회장은 미국 델타항공과 추진 중인 조인트벤처(JV)사업을 다른 항공사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JV란 두 회사가 한 회사처럼 공동으로 운임ㆍ스케줄 등 영업활동을 수행하고 수익ㆍ비용을 공유하는 경영 모델이다.
그는 앞선 간담회에서 "델타항공처럼 고차원적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협력을 극대화하는 수준의 JV를 추진할 계획"이라며 "다른 항공사들을 찾아가 직접 제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항공기 운영 전략도 보다 효율적으로 수정될 전망이다. 비용 대비 수익성이 낮은 대형 항공기의 도입을 최소화 하고, 고효율의 중형급 항공기 투입을 통해 수익성을 극대화 시킨다는 구상이다. 대한항공은 오는 2025년까지 보잉 787 시리즈 등 고효율 항공기 30여 대를 도입할 예정이다.
vs 조현아-조현민-이명희
한진그룹 비전 2023 성과
한진그룹 변화를 위한 조 회장의 전방위적 행보는 경영권 방어와도 관련이 깊다.
조 회장은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2대주주 KCGI와 1년 넘게 경영권 분쟁 중에 있다. 단순히 지분 구성만 보면 조 회장 및 특수관계인 지분이 28.94%로, KCGI의 지분 15.98% 보다 2배 가까이 많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3대주주로 올라선 델타항공(지분율 10%)이 우군으로 분류되면서 조 회장 측 지분은 현재 39%까지 늘어났지만, KCGI도 우호지분을 계속해서 끌어 모으고 있다. 만일 갑자기 등장한 반도건설(6.28%)과 함께 소액주주까지 KCGI 측에 서게 되면 반전도 가능한 상황이다.
가족간 분쟁도 불안 요소다. 이미 한진가(家) 삼남매는 경영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표출된 상황. 지금은 "가족끼리 잘 지내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에 따라 상속 지분을 균등하게(조 회장 6.52%,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6.49%, 조현민 한진칼 전무 6.47%)을 나눴지만, 셋 중 한 명이라도 이탈하면 경영권 분쟁이 벌어질 수 있다.
조 회장으로선 경영권 사수를 위해서라도 사내이사 임기가 만기 되는 내년 3월 말까지 자신의 경영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한진그룹이 올초 발표한 중장기 경영전략 '비전 2023'의 성과가 절실하다. '비전 2023'에는 한진그룹의 수익성 및 재무구조 개선 방안과 경영 투명성 및 주주 친화 정책 수립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이 담겨 있다.
조 회장은 이 틀 안에서 조직 문화를 개선하고, 수익성 강화 전략 등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사회를 열어 지배구조헌장을 제정 및 공표했다. 아울러 이사회의 독립성과 투명성 강화를 위해 사외이사추천위원회 위원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하고, 보상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안도 결의했다. 이를 통해 경영 투명성 강화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다.
취임 8개월 차의 조원태 회장. 아직 새내기 CEO지만 그의 경영 방향은 뚜렷하다. 그는 우선 '비전 2023'의 충실한 이행을 통해 주주와 임직원,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얻어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제들은 몇달 남지 않은 한진칼 주주총회 결과에 따라 속도가 달라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