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업이 미증유(未曾有)의 위기에 빠졌다. 미국과 중국간 갈등과 보호무역 강화, 후발주자 추격 등은 수출중심으로 성장해온 한국 산업에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라는 거대한 돌발변수는 그 영향을 배가시키는 상황이다. 국내 굴지 기업들마저 존망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처럼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해 강점(strength)은 '살리고' 약점(weakness)은 '보완하며' 기회(opportunity)를 '잡고' 위협(threat)은 '대비해야'만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시점이다. 한국 산업이 처한 다양한 상황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4편에 걸쳐 제시해 보고자 한다.[편집자]
"거대한 3차원 파도가 서울 강남을 휩쓸었다(Giant 3D wave sweeps over Seoul's Gangnam District)" 미국 보도채널 CNN은 최근 서울 강남구 코엑스 SM타운 뮤지컬 공연장에 설치된 초대형 입체 전광판(사이니지) 화면을 포착해 이런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이 매체가 주목한 건 농구장 4배 크기의 초대형 전광판에서 쏟아질듯 휘몰아치는 웅장한 입체적 물결의 미디어 아트. 코엑스 아티움 위 'ㄴ'자로 설치된 초대형 디스플레이(디지털 사이니지)와 거기서 금방이라도 삼성역 사거리에 폭포같은 물을 쏟아낼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 '웨이브(WAVE)'라는 제목의 영상 콘텐츠가 결합해 만들어낸 진풍경이었다.
대박이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일격으로 침체된 세계에 '서울 강남'의 새로우면서도 기술적으로 탄성을 자아내는 광경이 수 많은 국내외 매체를 통해 소개됐다.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서도 영상은 세계로 퍼날라지고 있다. SNS에는 "서울 강남에 세계의 이목이 이 만큼 집중된 것은 '강남 스타일' 이후 처음"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 옥외광고, 단속에 묶여 있었다면…
이 미디어 아트는 알고보면 일종의 '바람잡이' 영상이다. 대형 사이니지에 연출되는 광고 등 상업영상이나, 화면앞 광장에서 벌어지는 행사의 주목도를 높여 대중의 이목을 끌어모으고 상업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몇년 전만해도 서울에는 이런 게 불가능했다. 디스플레이 기술력이나 콘텐츠 창작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이미 세계 선두권이다. 이 영상을 탄생시킨 한국 디지털콘텐츠 기업 디스트릭트(d'strict)도 일반에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이 바닥'에서는 이름난 기업이다. 바르셀로나, 라스베이거스, 베이징 등지서 홀로그래픽 디스플레이, 프로젝션 맵핑 등 디지털 미디어 기술로 다양한 행사를 화려하게 성공시킨 이력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런 연출을 할 수 없었던 건 케케묵은 행정규제 탓이다. 불과 6년 전만 해도 대형 옥외광고물은 그저 단속의 대상이었다. 1962년 광고물 관리법이 최초 제정된 후 규제 중심이었던 옥외광고 관련법은 광고물의 종류·크기·색깔·모양 등과 설치가능 지역·장소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대형 전광판은 건물 옥상 등 멀찍이 보이는 곳에만 허용되는 식이었다.
그러나 2014년 광고 산업진흥의 목적이 관련법에 추가돼 개정되면서 전기가 마련됐다. 특히 코엑스 일대는 2016년말 국내 최초의 '옥외광고물 자유표시구역'으로 선정됐다. 당시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의 목표는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처럼 관광객 등 행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명소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성과는 그로부터 다시 4년 가까이 지난 후 빛을 보고 있다. 국내 1호인 삼성동 자유표시구역에는 2018년부터 코엑스 크라운 미디어, SM타운, 케이팝광장, 현대백화점면세점 무역센터점, 파르나스 호텔 등에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초대형 디지털 사이니지를 잇달아 설치했다. 향후 지어질 '현대차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와 기존 무역협회 빌딩은 아예 건물 한면을 대형 디스플레이로 덮게 된다.
디스트릭트 한 관계자는 "세계 여러 도시에서 DOOH(Digital Out-of-Home Advertising, 디지털 옥외광고) 작업을 해왔지만 국내에서 이런 큰 규모로 구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웨이브가 화제가 된 뒤 국내외 더 많은 기업과 기관에서 콘텐츠 구매나 협업 문의를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 "강한 것을 더 강하게 하라"
이 같은 옥외광고 산업의 사례는 코로나까지 겹쳐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는 한국 산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창의적 경쟁을 가로막는 규제가 풀리면 얼마든지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사이니지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산업 융합의 결정체로 일컬어진다. 디스플레이 산업의 제조업적 기반뿐만 아니라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운영과 구현능력, 예술적 감각이 가미된 창의적 콘텐츠가 어우러져야 그 상업적 효용과 심미적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마켓스앤드마켓스에 따르면 세계 디지털 사이니지 시장은 2019년 208억달러에서 2024년 296억달로 연 평균 7.3%의 성장률을 보일 전망이다. 지역적으로 타임스스퀘어처럼 집객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어 관광·서비스업 측면에서의 부수적 경제효과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에서는 디지털 사이니지처럼 새로운 유형의 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정부가 더욱 기민하게 규제 혁파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석유화학 등 우리나라 기업들이 기존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제조업 기반에 소프트웨어적 혁신이 더해져야 한다"며 "'강한 것을 더 강하게' 만들수 있는 전략을 바탕을 두고 산업 규제를 혁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번 코로나 이후 경제위기를 극복기 위해서는 전폭적인 입법 지원이 필요하다고 경제단체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경우 ▲투자 활성화 ▲일자리환경 개선 ▲신산업 창출이라는 3대 분야에서 획기적 변화가 필요하다며 총 40개 입법과제를 21대 국회에 제시했다.
민관합동 규제개선추진단 공동단장인 이련주 규제조정실장은 최근 대한상공회의소와의 공동 간담회에서 "우리 경제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주력업종 현장에서 원하는 규제혁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기업들이 체감할 수 있는 규제혁신을 위해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