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평가사들은 매년 가을 주요 대기업집단의 재무안정성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보고서를 내놓는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라는 돌발 변수로 사업적 변동성이 증폭했다. 그룹별 사업수익성이나 재무안정성도 편차가 커졌다. 시계가 불투명해진 상황 속에 신평사 보고서를 토대로 삼성·현대차·SK·LG·포스코·한화·GS·한진 등 주요 그룹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쟁점을 짚어본다.[편집자]
위기 속에서 진짜 실력을 보였다.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으로 전세계 자동차 회사 대부분이 적자를 낸 가운데 수 천억원대 이익을 낸 현대·기아차 얘기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 2분기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영업손실 규모는 폭스바겐 3조5273억원, 포드 3조3682억원, 다임러 2조8495억원 등에 이른다. 반면 이 기간 현대·기아차는 7355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전세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최근 현대차는 오는 3분기 세타2 엔진에 대한 품질비용으로 2조1300억원의 충당금을 반영한다고 밝혔다. 같은 이유로 기아차는 충당금 1조2600억원을 쌓는다. 팬데믹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또 다른 변수가 생긴 셈이다. 이익창출력 둔화, 현대차 그룹 부품업체 부진 등을 꼽은 신용평가사들의 '체크 리스트'에 리콜 비용이라는 또 다른 의문점이 추가된 것이다.
◇ 코로나 위기는 극복했지만
신용평가 3사는 대체로 현대차그룹이 코로나19 위기를 무난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국신용평가는 "현대·기아차는 주요 글로벌 완성차 업체 중 2분기 실적이 가장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코로나19로 글로벌 판매가 줄었지만 내수가 안전판 역할을 담당한 덕이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 2분기 글로벌 완성차 회사 가운데 현대·기아차가 유일하게 '이자·세금 차감 전 이익(EBIT)' 흑자를 기록했다.
앞으로 과제는 해외 시장이 얼마나 빨리 회복되느냐다. 한국기업평가는 "유럽, 미국 등 선진시장은 수요 침체가 빠르게 정상화되기 어려울 것"이라며 "중국은 현대·기아차의 브랜드력 약화로 판매 부진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고 신흥국은 수요 부진이 더욱 장기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해외가 되살아나지 못하면 이익창출력은 둔화된다. 현대차그룹의 자동차부문(완성차+부품) '상각전영업이익(EBITDA, 영업이익+감가상각비+무형자산상각비)는 2012년 18조2000억원에서 2018년 11조2000억원으로 내리막길을 걷다 지난해 14조4000억원으로 반등에 성공했다. 하지만 올해 코로나19로 성장세는 꺾였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차부문 영업현금 창출규모가 확대되지 못하면서 현금흐름 적자가 이어지고 있다"며 "추가적 수익성 개선이 되지 못하고 자금 소요가 늘면 현금흐름 적자가 심화된다"고 지적했다.
이 와중에 '리콜' 변수도 생겼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오는 3분기 세타2 엔진에 대한 품질비용으로 총 3조3900억원의 충당금을 한번에 반영하기로 했다. 코로나19를 빠져나오지 못한 가운데 조 단위 비용 부담까지 져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에 연이어 화재가 발생하고 있는 전기차 '코나'에 대한 리콜도 진행 중이다. 리콜 비용에 대한 신평사들의 평가는 아직 나오지 않지만 '리스크에 따른 대규모 비용부담'은 신용등급 조정의 '트리거(방아쇠)'가 될 수 있다.
◇ 부품사 부진…지배구조 변화도 주목
현대차그룹의 부품 회사들에 대한 우려도 깊다. 한신평이 등급을 부여한 현대트랜시스, 현대위아, 현대케피코 3사는 올해 2분기 합산 기준으로 765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올 하반기 현대차와 기아차의 실적이 회복되면 부품사들도 동반 개선될 수 있지만, 부품사들의 매출 비중이 높은 중국의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다는 점은 부담이다. 현대·기아차의 중국시장 점유율은 2018년 5.0%, 2019년 4.7%, 2020년 상반기 3.2%로 떨어지고 있다.
부품사들에게도 기회는 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전기차 시장이 열리면서 전기차 부품에 대한 수요가 늘 수 있다. 현재까진 그룹내 친환경차의 주요 부품 생산은 현대모비스가 맡고 있지만 향후 시장이 더 커지면 현대위아, 현대트랜시스, 현대케피코의 역할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 최근 전기차 전용 감속기(현대트랜시스), 열관리와 친환경차4WD(4륜구동) 시스템(현대위아) 등 전기차 전용 부품 연구개발이 강화되고 있다.
나이스신평은 작년에 이어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변화도 체크리스트에 올려뒀다. 현대차그룹이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끊기 위한 지배구조 개편에 나서게 되면 이와 관계된 계열사의 재무구조가 변동될 수 있어서다.
최근 정의선 회장이 현대차그룹 회장에 오르면서 지배구조 개편이 다시 급물살을 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나이스신평은 "향후 현대차그룹이 계열사 간 사업조정, 일감 몰아주기 규제 회피, 순환출자구조 해소, 경영권 승계 등을 위해 사업 분할이나 합병, 지분매각 등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