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고 두껍고 길고 큰' 것을 뜻하는 중후장대(重厚長大) 기업들이 딱딱한 사명을 바꾸고 있다. 기존 사명으로는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대응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한국경제를 지탱해온 '중공업'은 사명 변경 대상 1호가 됐다. 지난 3월 현대중공업지주는 사명을 'HD현대'로, 두산중공업은 사명을 '두산에너빌리티'로 각각 변경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사명 변경역사를 보면 경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이 회사의 모태는 '오대양 육대주를 넘어 나아간다'는 뜻이 담긴 현대양행(1962년 설립)이다. 양행(洋行)의 사전적 의미는 '서양으로 간다'로, 세계화에 대한 의지가 담겼다. 1980년 현대양행은 한국중공업으로, 2001년 한국중공업은 다시 두산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회사 주인이 바뀌어도 지켜온 '중공업'을 42년 만에 떼어낸 것이다.
에너빌리티는 'Energy'(에너지)와 'Sustainability'(지속가능성)를 조합한 말이다. 지속가능한 친환경 에너지를 만들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한 업계의 숙명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에너지'는 최근 중후장대 업계에서 유행하는 사명 중 하나다. 2020년말 LG화학의 전지사업을 분할해 신설된 LG에너지솔루션이 대표적이다.
S-OIL(에쓰-오일)과 토탈에너지스의 합작사인 에쓰-오일토탈윤활유는 지난 4월 사명을 에쓰-오일토탈에너지스윤활유로 바꿨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에너지원 석유 등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기업의 숙명이 되어버린 친환경 에너지를 사명에 새겨 넣은 것이다.
변하는 경영환경에 맞춰 사명을 군더더기 없이 바꾼 곳도 있다. 지난해 기아는 기존 사명(기아자동차)에서 '자동차'를 떼어냈다. 100년 넘게 전 세계의 발이 되어온 자동차 시대가 저물고, '모빌리티'라는 새로운 시장이 떠오르면서다. 당시 기아는 사업의 본질을 "이동성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SK는 사명 변경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군 중 한 곳이다. 지난달 SKC는 폴리우레탄 원료사업 자회사인 'MCNS'의 사명을 'SK피유코어'로, SK머티리얼즈가 'SK스페셜티'로 사명을 각각 변경했다. 작년 9월엔 SK종합화학이 'SK지오센트릭'으로 간판을 바꿨다. 지난해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사업은 'SK온'이라는 사명으로 분할됐다.
SK피유코어와 SK지오센트릭은 중심을 뜻하는 코어(core)와 센트릭(centric)이라는 단어를 사명에 넣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사명을 바꾼 한 회사 관계자는 "신규 사명에는 회사가 미래 먹거리로 지목한 신규 사업에 대한 의지가 담겼다"며 "기존 사업과 함께 신규 사업을 새롭게 끌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