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탈범용'이라는 구조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기술·설비·수요 세 축이 동시에 흔들리는 가운데 국내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분기점에 직면했다. 정체됐던 구조조정도 일부 기업 간 자발적 통합 움직임을 계기로 물꼬를 트고 있다. 하지만 민간 주도의 합종연횡만으로는 속도도 방향도 제한적이다. 정권 교체는 해묵은 개편 논의에 실질적 해법을 제시할 분기점이다. 이재명 정부가 공약한 '석유화학특별법'은 단순 지원을 넘어 산업 지형의 재설계를 겨냥하고 있다. 변곡점의 지형 한복판에서 움직이는 기업·바뀌는 시장·달라질 정책을 연속기획으로 짚어본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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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 업계가 '반등'이라는 착시 속에 더 깊은 위기로 파고들고 있다. LG화학·롯데케미칼·금호석유화학·한화솔루션 등 국내 주요 4개사의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4712억원으로 흑자 전환했지만, 본업인 석유화학 부문은 여전히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매출 대비 수익성은 바닥을 찍었고 현금창출력은 이자 감당조차 빠듯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잉여현금흐름(FCF)은 빚 의존도를 키우며 재무구조를 뒤흔들고 있다. 반등보다 버티기가, 회복보다 정리가 절실한 시점이다.
더 깊어진 석유화학 본업 적자
올해 1분기 국내 주요 석유화학 4사(LG화학·롯데케미칼·금호석유화학·한화솔루션)의 전사 기준 영업이익 합계는 4712억원. 전년 동기 -67억원에서 대폭 늘어난 수치로, 겉으로만 보면 '실적 반등'의 신호처럼 읽힌다.
그러나 본업인 석유화학 부문만 따로 들여다보면 상황은 정반대다. 해당 4사의 석유화학 영업이익 합계는 -1537억원으로 전년 동기(–964억원)보다 적자 폭이 60% 가까이 늘었다. 2023년 -721억원이던 연간 손실은 2024년 –8475억원으로 불어나며 사실상 주저앉았다.
이차전지와 태양광 등 비(非)석유화학 부문이 연결 실적의 반등을 이끈 건 맞지만, 그 이면엔 본업 부문의 급격한 침식이 숨어 있다. 석유화학 사업만 놓고 보면 반등은커녕 적자 국면이 더 깊어졌다는 평가다.

실제 수익성·현금창출력·재무안정성 등 주요 지표 대부분에서 오히려 악화 흐름이 나타났다. 우선 '조정영업이익률(매출액 대비 EBIT)'에서 가장 극명했다. 이는 기업이 영업활동만으로 얼마를 벌어들였는지 보여주는 핵심 지표다. 회계상 영업이익률과 달리 감가상각 등 비현금성 항목이나 일회성 비용을 제거해 기업의 '순수 수익력'을 보다 정직하게 보여준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4개사 중 금호석유화학만이 6.3%의 조정영업이익률을 기록하며 수익성을 안정적으로 방어했다. 이외 3개사는 1%에도 못 미치는 수익률에 그치며 부진한 흐름을 드러냈다.
LG화학은 –107억원의 EBIT, –0.1%의 마진으로 전년 동기(757억원)에서 적자 전환했다. 롯데케미칼도 –1266억원의 EBIT과 –2.6%의 마진으로 수익성 저하가 이어졌다. 양사 모두 이익 반등의 뚜렷한 조짐 없이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는 셈이다.
한화솔루션은 1분기 간신히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마진이 1.0%에 그쳐 아직 정상 궤도에 올라섰다고 보긴 어렵다는 중론이다.

'상각전영업이익(EBITDA) 대비 금융비용'에서도 구조적 문제가 드러난다. 이는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으로 이자비용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재무건전성 지표다. 흔히 'EBITDA 이자보상배율'로 불리며, 부채상환 여력을 나타내는 일종의 체력 지수다. 수치가 낮을수록 이자 부담이 크다는 뜻이고, 높을수록 이자를 내고도 현금 창출 여력이 있다는 의미다. 통상 2배 미만이면 '이자 내기도 빠듯한 상태'로 간주된다.
올해 1분기 기준 EBITDA 대비 금융비용은 한화솔루션 1.6배, 롯데케미칼 1.8배 수준에 그쳤다. 이자 비용을 겨우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업 체력의 한계선에 가까운 수치다.
롯데케미칼은 2021년 말까지만 해도 이 비율이 27.8배에 달했지만 2022년 말 1.2배로 급락했다. 이후 2023년 2.2배, 2024년 말 0.9배까지 떨어졌다가 올해 겨우 반등했다. 한화솔루션도 2021년 말 9.4배에서 매년 하락을 거듭하며 2024년 말 0.7배까지 떨어졌다가 올해 1.6배로 소폭 회복했을 뿐이다.
LG화학도 예외는 아니다. 올 1분기 기준 EBITDA 대비 금융비용은 4.6배다. 2021년 말 37.3배에서 △2022년 21.4배 △2023년 9.0배 △2024년 말 4.3배까지 가파르게 하락해왔다. 본업 수익성 둔화와 함께 영업현금흐름 자체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재무 체력 저하에 대한 경고등이 켜졌다는 평가다.
금호석유화학 역시 마찬가지다. 2021년 말 90배가 넘던 비율은 올 1분기 18.4배까지 떨어졌다. △2022년 말 45.3배 △2023년 말 18.9배 △2024년 말 15.3배 등 하락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수익성 자체는 비교적 선방하고 있지만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이는 현금의 여유는 빠르게 줄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장사해도 현금은 마이너스…빚만 늘었다
마지막으로 짚어야 할 지표는 잉여현금흐름(FCF)이다. FCF는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에서 유·무형자산에 대한 투자 지출을 제외, 실제 손에 쥘 수 있는 돈을 뜻한다. 해당 수치가 마이너스라는 건 '장사를 해도 남는 돈이 없다'는 뜻이다.
올해 1분기 기준 LG화학의 FCF는 -2조1553억원, 한화솔루션은 -8668억원으로 대규모 현금 유출이 이어졌다. 이들 기업은 수년전부터 FCF 적자를 기록해왔다. LG화학은 △2022년 –7조8976억원 △2023년 –5조4638억원 △2024년 -7조6334억원에 이어 올해 1분기에도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화솔루션 역시 △2022년 –8986억원 △2023년 –2조562억원 △2024년 -3조548억원 등으로 해마다 적자 폭이 누적되고 있다.
롯데케미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2021년 7643억원의 플러스를 기록한 이후 △2022년 -2조5970억원 △2023년 -2조8404억원 △2024년 -8187억원까지 FCF 적자가 이어졌다. 올해 1분기에는 -196억원으로 그 폭을 크게 줄이긴 했지만, 아직 마이너스를 벗어나진 못한 상태다.
금호석유화학만이 비교적 선방 중이지만 역시 하락세가 뚜렷하다. 2021년 1조7739억원이던 FCF는 2022년 903억원에서 2023년 422억원으로 감소했고, 2024년 –1122억원에 이어 올해 1분기 -184억원으로 적자 전환됐다.

FCF 악화는 결국 기업의 '빚 의존도'를 키우고 있다. 한화솔루션의 부채비율은 올해 1분기 192%까지 치솟아 200%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2021년 말 144%에서 불과 4년 만에 50%포인트 가까이 상승한 수치다. 통상 부채비율이 100% 이하일 경우 재무적으로 안정적인 수준으로 간주되지만 200%를 넘어서면 재무 리스크가 본격화됐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같은 기간 순차입금은 4조6237억원에서 11조9773억원으로 2.5배 이상 불었다. 총자산에서 실질적 부채가 차지하는 순차입금 의존도는 39.3%다. 4개사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LG화학은 부채비율만 보면 97.7%로 비교적 양호해 보이나, 흐름은 심상치 않다. 2021년 말 120.3%였던 수치는 2022년 81.4%까지 낮아졌지만 이후 3년 연속 상승, 다시 100%에 근접했다. 특히 같은 기간 순차입금은 10조9403억원에서 22조1093억원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롯데케미칼도 흐름은 비슷하다. 2021년까지 이어가던 무차입 경영 기조는 2022년 들어 완전히 돌아섰다. 올 1분기 순차입금 규모는 6조6244억원이다.
금호석유화학도 '순현금 기조'에 마침표를 찍었다. 2021년 말 -7305억원이던 순차입금은 올해 1분기 2071억원으로 반전됐다. 부채비율(37.7%)과 순차입금 의존도(2.5%) 모두 여전히 업계 최저 수준이지만, 과거 '현금부자'로 불리던 시절과는 분명한 간극이 생겼다.
"팔 수 있는 건 판다"…생존형 현금확보
재무 부담이 커진 석유화학 기업들은 하나둘 자구책에 나서고 있다. 범용 사업에서 중국 저가 공세에 밀리자 비핵심 자산을 정리하고, 유동성 확보에 집중하는 흐름이다. 투자 여력을 스페셜티(고부가) 중심으로 재배분하려는 포트폴리오 조정도 본격화되고 있다.
LG화학은 최근 글로벌 2위 수처리 필터 사업인 '워터솔루션' 부문을 1조4000억원에 매각키로 했다. 지난 2014년 미국 나노H2O 인수로 시작된 이 사업은 RO멤브레인(역삼투막)을 활용해 해수담수화·산업용수 정제에 사용되는 특수 필터를 만든다. 청주공장 증설까지 단행하며 키웠던 사업이지만 석유화학 부문의 만성 적자가 지속되자 결국 구조조정 대상으로 분류됐다.
롯데케미칼은 올해 2월 파키스탄 자회사 LCPL을 978억원에, 3월에는 일본 레조낙 지분 2750억원어치를 매각했다. 확보한 자금은 차입금 상환에 투입하고 있다. 나프타분해시설(NCC) 통합 운영을 위해 HD현대와 협의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한화솔루션은 유휴 부지 매각을 통한 현금 확보에 나섰다. 지난 4월 계열사에 여수 부지를 넘겨 362억원을 확보, 지난해엔 울산 사택 부지를 정리해 1600억원가량을 손에 쥐었다. 지난해 3조원대였던 설비투자(CAPEX) 규모도 올해는 2조원대로 줄일 계획이다.
이처럼 주요 기업들이 저마다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산업 전체를 바꾸기엔 정부의 역할이 필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석유화학 산업은 유동성 위기와 글로벌 경쟁 격화라는 이중 전선에 놓여 있다"며 "정책금융 확대·고부가 친환경 전환 지원·국제 규제 대응체계 구축 등 산업 체질을 바꿀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종합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금융기관의 유연한 판단과 정부의 맞춤형 지원이 더해진다면 업계 전반의 연쇄 위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도 "중국은 이미 국내 석유화학 생산시설 상당수를 인수해 주문제작생산(OEM) 형태로 자국 수출에 활용하고 있다"며 "한국 석유화학 기업이 저가 제품 위주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로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결국 산업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김 교수는 "이재명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NCC 설비 통폐합을 유도하고, 정책금융으로 국내 석유화학 경쟁력 확보를 도와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