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모듈원전(SMR) 시장의 무게중심이 설계 경쟁에서 제작 준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아직 착공 단계 사업은 제한적이지만 핵심 기자재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누가 먼저 준비를 끝내느냐가 경쟁의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미국에서 먼저 감지됩니다. 차세대 SMR을 둘러싼 논의가 기술 검증을 넘어 실제 공급망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로 확장되는 흐름인데요. 제작 일정의 출발점이 되는 공정을 누가 쥐느냐가 중요해지는 국면이죠.
이 흐름 속에서 두산에너빌리티가 최근 미국 SMR 개발사 엑스-에너지와 체결한 단조품 예약계약이 주목받고 있는데요. 차세대 SMR 공급망의 '앞단'을 잡은 비결을 들여다볼까요.
SMR 첫 단추 선점
이번 계약은 엑스-에너지가 건설을 추진 중인 SMR 모델 'Xe-100' 16대에 사용될 단조품을 대상으로 합니다. 주기기 제작에 필요한 핵심 소재를 미리 확보한 사례죠.
단조품은 SMR 주기기 제작에 필요한 중·대형 소재로, 제작에 많은 시간이 소요돼 프로젝트 초기부터 조달이 중요합니다. 이번 예약계약 이후 두산에너빌리티는 엑스-에너지와 후속 계약을 통해 단조품과 모듈 제작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엑스-에너지가 추진 중인 사업 규모를 보면 이 선택의 맥락이 보다 분명해집니다. 엑스-에너지는 미국 에너지부(DOE)의 지원을 받는 차세대 고온가스로 SMR 개발사로, 헬륨가스를 냉각재로 사용하는 Xe-100 원자로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첫 사업으로는 미국 화학기업 다우(Dow)가 텍사스주 산업단지에 Xe-100 4대를 도입할 계획이고 워싱턴주의 공공 전력 공급 기업인 에너지 노스웨스트(Energy Northwest)에는 12대를 공급할 예정입니다.
특히 에너지 노스웨스트 사업은 아마존웹서비스(AWS)와 엑스-에너지가 함께 참여해 2039년까지 총 5GW 규모, Xe-100 60대를 단계적으로 구축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초기 물량부터 제작 일정 관리가 중요한 구조인 만큼 주기기 제작의 출발 공정을 먼저 계약으로 확보하려는 선택으로 해석됩니다.
SMR에 건 원전 전략
그간 두산에너빌리티와 엑스-에너지의 협력은 단계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2021년 SMR 주기기 제작을 위한 설계 용역 계약으로 관계가 시작됐고 2023년에는 두산이 엑스-에너지 지분 투자에 참여했습니다. 지난 8월에는 아마존, 한국수력원자력과 함께 4자 MOU를 체결하며 사업 협력 범위를 넓혔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SMR 사업에 힘을 싣고 있는 배경에는 박지원 회장의 판단이 깔려 있습니다. 박 회장은 대형 원전 중심이던 두산에너빌리티의 원자력 사업 구조를 SMR로 확장하는 데 공을 들여왔는데요. 2019년부터 국내 투자사들과 함께 미국 SMR 개발사 뉴스케일파워(NuScale)에 1억400만 달러를 투자하며 국내 업체 중 가장 이른 시점부터 글로벌 SMR 사업에 참여해 왔습니다. 최근 행보도 이런 전략이 단계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같은 방향성은 향후 투자 계획에서도 확인됩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올해 3분기 실적 발표 이후 뉴스케일과 엑스-에너지 사업 구체화에 맞춰 SMR 전용 생산시설 구축을 준비 중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투자 규모나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대량 생산 체계를 도입해 연간 최대 20기 수준의 SMR 제작이 가능한 설비를 구축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으며 이를 위해 경상남도와 창원시의 행정·재정 지원을 전제로 한 협약도 체결했습니다.
현재 SMR 시장은 설계 경쟁을 넘어 누가 먼저 만들 준비를 끝냈는지가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이번 선택도 이 변화 속에서 공급망의 출발점을 선점하려는 행보로 읽힙니다. 이 흐름이 향후 SMR 사업의 실제 발주와 공급망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향후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