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분야에서 서로 경쟁하는 '라이벌(Rival)'이 항상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와 애플만 해도 스마트폰 사업 초기부터 티격태격, 서로를 넘어서기 위한 무한경쟁을 하다 글로벌 시장을 양분하는 회사로 나란히 크지 않았나. 국내 증권 업계에서도 비슷한 체급의 회사들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맞수 관계를 형성, 마라톤의 페이스 메이커처럼 상대방의 역량을 끌어내는 역할을 맡으며 함께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업계를 대표하는 맞수를 꼽아보고 이들의 핵심 역량을 비교해본다. [편집자]
투자은행(IB) 업계를 이끄는 증권사 가운데 KB증권과 NH투자증권은 '전통의 강호'로 꼽힌다.
각각 KB국민은행과 NH농협은행이라는 든든한 은행을 계열사로 두고 있으며, 금융지주의 신규 비즈니스모델 선봉장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비슷하다. 브로커리지 위주의 수익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행어음 사업에 나란히 진출한 것도 공통점이다.
반백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갖고 있고 이 과정에서 시대를 풍미한 증권사를 인수합병(M&A)하며 외형 성장을 해온 궤적이 묘하게 닮았다. 각각의 수장이 왕년에 IB 업계를 주름 잡았던 실력자라는 점 역시 눈길을 끈다. 초대형 IB로서 두 회사가 펼치는 라이벌 경쟁에 관심이 모이는 이유다.
◇ 금융그룹 내 비은행 주축으로
NH투자증권과 KB증권은 증권업계 자기자본 기준(9월말)으로 각각 2위, 4위 회사다. 순이익(1~3분기 누적)으로 따지면 NH투자증권(3599억원) 4위, KB증권(2418억원)이 7위에 해당한다. 다른 금융지주 계열인 신한금융투자(2021억원)와 하나금융투자(2116억원)보다 앞서는 성적이다.
특히 NH투자증권은 1~3분기 누적으로 역대 최대를 달성했다. 사상 최대를 기록했던 지난해 연간 순이익(3615억원)과 불과 20억원 밖에 차이가 안난다. 지금의 분위기라면 2년 연속 역대급 실적이 가능할 전망이다.
두 회사는 든든한 실적을 기반으로 금융그룹 내에서 비은행 부문 주축을 담당한다. NH농협금융 계열사 가운데 NH투자증권의 순이익(1~3분기 누적)은 농협은행(1조1922억원) 뒤를 이어 비은행부문 가운데 톱(Top)이다.
이 기간 농협캐피탈(402억원)과 농협생명(247억원)과 NH아문디자산운용(135억원), NH저축은행(130억원), 농협손해보험(40억원)의 실적을 모두 합쳐도 1000억원에 불과하다. NH투자증권의 순이익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주 보유지분을 감안하면 11%로 적지 않은 수준이다.
KB증권 또한 KB금융그룹 내 효자 계열사다. 이 기간 KB국민은행이 2조원을 웃도는 순이익(2조67억원)을 냈으며 뒤를 이어 KB국민카드(2510억원)와 KB손해보험(2342억원)도 KB증권 못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KB증권의 순이익이 그룹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로 NH투자증권의 비중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 다만 KB국민은행과 KB손해보험 등 주력 계열사 실적이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주춤한 반면 KB증권은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 나란히 발행어음 신규사업 진출
이 두 증권사가 금융지주 내에서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룹 내에서도 자기자본 덩치가 큰데다 금융지주들이 키우고 있는 IB와 WM(자산관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NH투자증권과 KB증권은 각각 금융그룹 내에서 은행에 이어 두번째로 자기자본 규모가 크다.
자본 사이즈는 키우면 키울수록 증권사에 유리하다. 금융당국이 초대형 IB 육성을 위해 자기자본 규모별로 차별적인 인센티브와 신규 사업 면허를 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브로커리지 위주의 수익 구조에서 탈피해 새로운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선 일정 규모의 자기자본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금융당국으로부터 초대형 IB에 지정되어야 발행어음 사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발행어음이란 영업자금 조달을 위해 자체 신용으로 발행하는 어음으로 일종의 증권채다. 기존 종금사의 발행어음과 차이점은 자기자본의 200%까지 발행이 가능하며 조달자금의 운용 자산 가운데 50%는 기업금융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행어음 사업은 자기자본 4조원 이상 증권사만 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단기금융업 사업자로 지정을 받아야 가능하다. 현재 초대형 IB로 지정된 증권사는 NH투자증권과 KB증권을 포함해 미래에셋대우와 한국투자증권·삼성증권 5곳이다.
이 가운데 발행어음 사업자는 한국투자증권과 NH투자증권을 비롯해 5월 금융위원회로부터 단기금융업 인가 승인을 받은 KB증권까지 세곳이다. 한국투자증권을 제외하고 금융지주사 내 증권 계열사 가운데 NH투자증권과 KB증권이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작년 7월 사업을 시작한 NH투자증권의 올 3분기말 발행 잔액은 3조5581억원이다. KB증권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앞세워 발행잔액을 이 기간 1조3508억원으로 확대했다.
◇ 전통의 강자가 탄생하기까지
NH투자증권은 옛 우리투자증권이 NH농협증권과 2014년 말에 합병해 탄생한 증권사다. 아울러 KB증권은 90년대 '바이코리아 펀드'로 전성기를 구가한 옛 현대증권이 KB투자증권과 합병해 2017년 출범한 통합법인이다.
우리투자증권과 현대증권은 한때 대우증권(현 미래에셋대우)과 함께 3파전을 하는 쟁쟁한 회사였다. 지금의 NH투자증권과 KB증권이 탄생하기까지 궤적을 보다보면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회사의 설립 연도는 1960년대로 사람 나이로 치면 50살에 가깝다.
NH투자증권이 'IB 명가(名家)'로 불리는 이유도 옛 우리투자증권 시절부터 IB를 주목하며 사업 확대에 공을 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NH투자증권은 은행만 해오던 인수금융 사업을 최초로 뛰어든 회사다.
IMF 외환위기 이전인 1997년 이전까지 14%에 달했던 은행 금리는 이후 하향 안정세로 정착하면서 증권사 금리와 별반 차이가 없어졌는데 당시 IB 사업부를 이끌었던 정영채 전무(현 대표이사)는 김연수 팀장(현 투자금융본부장)에게 '완전히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때 김 팀장이 기획한 것이 지금의 IB다.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NH투자증권은 단기간에 인수금융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로 도약했다. 당시 정 전무가 IB 사업부 담당 임원을 맡았던 시기 NH투자증권은 국내 증권사 가운데 최고의 IB로 발돋움했다는 평가다.
KB증권은 옛 현대증권과 통합을 발판으로 기존 강점인 IB를 비롯해 WM, 세일즈앤트래이딩(S&T) 3개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특히 작년말 단행한 인사를 통해 IB 전문가인 김성현 사장과 KB국민은행 자산관리그룹 부행장 출신인 박정림 사장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KB증권은 통합법인 출범 때부터 각자대표 체제를 유지해 사업 영역을 두 대표가 나눠 전담하고 있다.
IB와 WM의 성장에 힘입어 작년 하반기 적자를 냈던 KB증권은 반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 분야 전문가인 박정림·김성현 사장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