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했다'.
다름 아닌 자기자본 2조원 이상 대형 증권사 10곳의 지난해 성적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만년 2위에 머무르는가 했던 미래에셋대우가 '무적'처럼 여겨졌던 한국투자증권을 넉넉한 차이로 제치고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연간 순이익 왕좌를 거머쥐었다. 자기자본 10조원에 육박하는 국내 최대 증권사로서 드디어 덩칫값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래에셋대우를 필두로 한 대형사들은 국내 주식시장 역사에 길이 남을 '동학개미운동'을 발판 삼아 너 나 할 것 없이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다. 10개사 중 전년보다 순익을 1000억원 넘게 불린 증권사가 6개에 달할 정도다. '실적 잔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온라인 주식거래 1위 증권사로 일찌감치 입지를 다져놓은 키움증권은 동학개미운동 속에서 일약 스타 증권사로 부상하면서 순익이 2배 가까이 늘어나는 기염을 토했다. 이에 따라 10개 대형사들의 순익 합계는 2019년 4조원에서 1년 만에 5조원대로 올라섰다.
대부분의 증권사들이 축포를 터뜨리며 실적 개선의 기쁨에 흠뻑 취한 와중에 홀로 쓰린 속을 달래는 증권사도 있었다. 신한금융투자는 사모펀드 사태의 도화선이 된 라임자산운용 펀드 사고에 발목이 잡히면서 대형사 중 유일하게 실적이 뒷걸음질 치는 굴욕을 맛봤다.
◇ 한투 아성 넘은 미래에셋…세전이익 1조 시대 열어
미래에셋대우는 지난해 8183억원의 연결 순익을 달성하면서 업계 순익 선두 자리를 꿰찼다. 2016년부터 4년 연속 1위를 수성하던 '숙명의 라이벌' 한국투자증권(7083억원)을 여유 있게 제쳤다.
회사 규모 대비 수익성이 떨어진다고 꾸준히 지적받던 미래에셋대우는 2015년 미래에셋증권과 옛 대우증권 합병 후 첫 순익 1위 타이틀을 차지한 것과 더불어 금융투자업계 최초로 세전이익 1조원을 돌파하는 겹경사를 맞았다.
개인투자자들의 주식투자 열풍으로 위탁매매(브로커리지) 수수료가 급증한데다 균형 잡힌 사업 구조를 바탕으로 해외사업 부문과 자산관리(WM), 투자은행(IB), 트레이딩 등 전 영업부문에서 고른 성과를 낸 덕분이다.
공격적인 영업을 기반으로 국내 증권사 중 최고의 수익 창출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한국투자증권은 미래에셋대우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며 자존심에 금이 갔다. 미래에셋대우가 2019년과 비교해 순익 규모를 1500억원 넘게 불린 반면 한국투자증권은 200억원을 늘리는 데 그친 탓이다. 지난해 1분기 주가연계증권(ELS)과 관련한 헤지 손실을 반영하면서 1339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게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했다.
'디펜딩 챔피언'과 '도전자'로 입장이 뒤바뀐 미래에셋대우와 한국투자증권은 올해 자존심을 걸고 더 치열한 수익 대결을 펼칠 전망이다.
◇ 키움증권, '다크호스' 타이틀 떼고 선두권 경쟁 합류
미래에셋대우와 한국투자증권의 양강 대결 이상으로 주목할만한 것은 '개미들의 증권사' 키움증권의 대활약이다. 키움증권은 지난해 7000억원에 육박하는 뭉칫돈을 쓸어 담으며 한국투자증권에 불과 140여억원 차로 뒤진 3위를 기록했다. 순익 순위는 3계단 수직 상승했다.
1분기 67억원을 벌어들이는데 그쳤지만 3분기에 전체 증권사 가운데 가장 많은 2637억원의 순익을 기록하는 등 2~4분기에 놀라운 반전을 이끌어내며 분위기를 180도 바꿨다. 2018년 1932억원이었던 순익은 2019년 3628억원으로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에는 6939억원까지 불어났다. 이 기간 연간 순익 증가율은 90% 내외로, 실로 엄청난 성장세다. 과거 '다크호스'로 여겨졌던 키움증권은 이제 미래에셋대우와 한국투자증권을 위협하는 선두권 대형사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업계 예상처럼 브로커리지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발휘한 것이 폭발적인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키움증권의 지난해 12월 신규 계좌 수는 50만건을 넘어서면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예수금 평균잔액도 7조8000억원대로 1년새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외에도 신용공여, 대출, 채권 등 이자수익과 자산운용이익 등이 골고루 개선됐다.
올해도 개인투자자 중심의 장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키움증권을 향한 증권가의 시각은 일단 긍정적이다.
◇ NH, 옵티머스 악재에도 선방…메리츠·삼성 안정적 성과
자기자본 2위 증권사 NH투자증권은 옵티머스 펀드 사고 여파에도 전년 대비 1000억원 가량 순익을 불리면서 4위(5769억원)에 랭크됐다. 여타 대형사와 마찬가지로 브로커리지와 금융상품 판매, IB 부문의 수수료 수익이 늘어나면서 연간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옥에 티'라면 옵티머스 관련 충당금(320억원)에다 해외 자산과 헤지펀드 자회사 평가손실 등이 반영되면서 4분기 순익(756억원)이 시장 컨센서스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는 점이다. 옵티머스의 악몽은 당분간 NH투자증권을 괴롭힐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 따르면 NH투자증권의 옵티머스 누적 충당금 규모는 전체 판매잔액 대비 30% 선에 그치고 있다. 거래대금 증가 등으로 이익을 내더라도 향후 추가 충당금 적립 여부에 따라 실적 개선 효과는 반감될 여지가 있다.
메리츠증권은 2019년(5546억원)에 이어 2년 연속 5000억원대(5651억원)의 순익을 올리면서 특유의 꾸준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키움증권과 NH투자증권의 순익이 급증한 탓에 순위는 3위에서 5위로 2계단 밀려났다. 최근 성장세를 주도했던 IB 부문의 성과가 코로나19 여파로 상대적으로 도드라지지 못하면서 상대적으로 순익 증가폭이 적었다.
삼성증권은 전년보다 순익을 30%가량(1158억원) 늘리면서 NH투자증권, 메리츠증권과 더불어 5000억원대(5076억원) 순익 증권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2016년 이후 5년 연속 순이익 증가 행진을 이어갔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WM분야의 강점을 기반으로 국내외 주식 거래 수수료로만 2100억원 넘게 벌어들였다. 업계 전문가들은 증권사 자산관리 시장의 성장세를 고려할 때 삼성증권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관측하고 있다.
◇ KB·하나금투·대신 웃었지만 신한금투는 홀로 쓴맛
KB증권과 하나금융투자는 전년보다 1300억~1400억원가량 이익을 불리면서 사이 좋게 4000억원대 순익 증권사가 됐다. KB증권은 전년 대비 49% 늘어난 4340억원, 같은 기간 하나금융투자는 46% 늘어난 4100억원의 순익을 거둬들였다. 두 회사의 순익 순위는 각각 7, 8위로 지난해와 동일하다. 양사 모두 개인 거래대금 증가와 신규 고객 유입 확대 등으로 브로커리지 수익이 늘어난데다 IB 부문에서도 양호한 성과를 냈다.
대신증권은 라임 펀드 사고의 충격에도 전년 대비 74% 넘게 늘어난 1642억원의 순익을 기록하며 순위를 10위에서 9위로 한 단계 끌어올렸다. 라임펀드 선보상과 계열사 보유세 등을 반영한 일시적 비용이 938억원에 달했음에도 브로커리지와 IB 등에서 선전하며 역대급 성과를 달성했다.
반면 신한금융투자는 나 홀로 웃지 못했다. 지난해 순익이 전년 대비 30%가량 줄어든 1548억원에 그치면서 10개 대형사 중 꼴찌를 기록한 탓이다. 브로커리지와 IB 등이 호조를 보이며 수수료 수익이 45% 넘게 증가했지만 라임 펀드 관련 손실 비용 등을 반영하면서 순익이 역성장했다. 작년 4분기에만 라임 펀드 총수익스와프(TRS) 관련 손실 등으로 1287억원의 일회성 비용이 발생했다.
게다가 NH투자증권과 KB증권, 하나금융투자 등 다른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들이 호실적으로 전체 지주 실적 개선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은 데 반해 신한금융투자는 부진한 실적으로 신한금융지주가 3년 만에 KB금융지주에 금융지주 순익 1위 자리를 내주는 데 'X맨' 노릇을 했다는 오명까지 썼다.
올해도 증권사들의 실적은 대체로 양호할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19 유행이 지속되면서 각국 중앙은행이 돈을 풀고 있고, 이런 막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주식시장에 투자자들의 유입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증권사 실적 호조의 기반이 되는 브로커리지 수익 증가 행진에 긍정적이다. 다만 급등에 따른 피로감과 글로벌 경제 환경 변화 등으로 증시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