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당국이 증권사들의 채권형 랩어카운트, 신탁 영업 관행을 겨냥해 전수조사를 진행 중인 가운데 랩·신탁 잔고가 작년말 대비 감소하는 추세다. 일부 증권사들은 채권형 랩, 신탁 영업을 중단하는 등 몸 사리기에 나섰다. 관행적으로 만기 불일치 전략을 활용해온 채권형 랩어카운트 상품이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4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일임형 랩어카운트 잔고는 112조6480억원으로 작년말 대비 2조4700억원 감소했다. 증권사에 예치된 금전신탁은 224조9390억원으로 작년 말 11조6500억원 줄었다. 이중 채권형은 63조5400억원으로 작년말 대비 6710억원 뒷걸음 쳤다.
증권사들이 자체적으로 채권형 랩, 신탁 영업을 줄이는 이유는 당국의 감독이 강화되면서다. 금융감독원은 연초 랩·신탁 관련 불건전 영업관행을 테마검사 대상 중 하나로 선정했으며 5월 초부터 하나증권, KB증권, 교보증권을 시작으로 업계 점검에 나섰다.
통상 채권형 랩 신탁은 법인이 3~6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동안 돈을 굴리는 수단으로 쓰인다. 그러나 증권사들은 법인 자금 유치를 위해 높은 수익률을 제시하고 이를 맞추기 위한 용도로 단기 기업어음(CP) 대신 장기CP를 편입해 운용하는 만기불일치 전략을 써왔다.
문제는 일부 증권사가 자금 반환시기가 도래했음에도 환매가 어려운 경우 다른 고객의 계좌 혹은 증권사 고유자금을 활용해 장기CP를 비싸게 사줘 수익률을 메운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금감원은 검사를 진행중이던 지난 3일 이례적으로 자료를 배포해 불법 사례를 공유하는 동시에 위법개연성이 높은 증권사를 추가로 검사하겠다고 밝혔다.
채권형 신탁 영업을 자체적으로 축소한 곳도 있다. 한 금투업계 관계자는 "작년 말 A증권사가 신탁영업에서 채권을 축소했다"며 "올해도 B증권사에서도 위법 정황이 파악되면서 자제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는 "증권사에서는 채권 트레이딩 부서가 판매상품에 편입된 자산을 융통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 방식이 불법으로 취급되면서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영업을 소극적으로 하는 곳이 늘고있다"고 전했다.
당국으로부터 기관제재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랩, 신탁 영업을 축소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기관제재로는 등록인가취소, 영업정지, 시정명령, 기관경고, 기관주의 등 5가지가 있으며, 기관경고 이상은 중징계로 분류돼 해당 조치를 받은 증권사는 1년 이상 금융당국의 인허가가 필요한 신사업에 진출할 수 없다.
더욱이 연기금, 공제회 등 기관들은 위탁운용사나 거래기관 선정기준에 '감독기관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증권사가 기관경고 등 제재를 받을 경우 최소 3개월은 거래풀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커진다. 큰손들의 자금을 중개하기만 해도 발생하는 수수료 수익이 상당하기 때문에 거래풀에서 빠지면 증권사 수익에 타격이 크다.
일각에서는 채권형 랩, 신탁 상품이 아예 자취를 감춰버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관행적으로 이어져오던 돌려막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거지면서 단기채 대신 장기채를 편입해 운용하는 만기불일치 전략을 활용하기 어려운 탓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장기채를 편입하지 못하면 수익률이 기존과 비교해서는 물론, 수수료가 더 낮은 머니마켓펀드(MMF)에 미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