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기업공개(IPO) 시장은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 여파로 국내외 주식시장이 얼어붙으며 '대어(大魚)'들이 자취를 감췄다.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것이란 우려에 상장 철회가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대어가 사라진 상반기 IPO 시장은 중소형주들이 이끌었다. 신규 상장사 상당수가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며 '따상(공모가의 두배에서 시초가 형성 후 상한가)'을 달성하는 등 공모가 대비 높은 수익률로 선방했다. 그럼에도 IPO 시장 공모액 규모는 예년과 비교해 초라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4분기 IPO 시장에는 훈풍이 예상된다. 지난달 파두(코스닥)를 시작으로 두산로보틱스(이하 두산로보) 등 '조 단위' 몸값의 대어가 등장하며 시장 규모가 다시 회복세에 접어들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두산로보 열기 잇는다…서울보증·에코머티리얼즈 출격 준비
지난주 일반 공모청약에 나선 두산로보는 개인투자자 자금 33조원을 끌어모으며 흥행 기록을 다시 썼다. 공모청약에서 개인자금 30조원 이상을 모은 것은 LG에너지솔루션 이후 약 1년 8개월 만이다. 이에 두산로보는 역대 공모주 청약 증거금 9위에 이름을 올렸다.
두산로보와 하루 간격을 두고 공모청약을 진행한 밀리의서재도 시장에서 약 2조원에 달하는 금액을 끌어모았다. 상반기 상장 철회 후 재도전에 나서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지난주 연이어 조 단위 자금이 모이면서 이른바 'IPO 슈퍼위크'를 장식했다.
열기의 바통은 최대 3조원대 몸집이 예상되는 SGI서울보증보험이 이어받을 전망이다. 시장에 충분한 투자 대기 자금이 확인된 만큼 이후 IPO 시장 출격을 준비 중인 대어들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SGI서울보증은 보증보험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기업이다. 지난해 매출액 2조6000억원, 당기순이익 5685억원을 거둬들였다. 다음 달 13~19일 수요예측과 일반청약(10월 25~16일)을 거쳐 11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할 예정이다. 희망공모가(3만9500~5만1800원) 기준 예상 시가총액은 2조7579억~3조6167억원으로 올 들어 현재까지 최대 규모다. 삼성증권과 미래에셋증권이 상장 대표 주관사를 맡았다.
다만 서울보증은 2010년 한국지역난방공사 이후 13년 만의 공기업 상장으로, 상장목적 자체가 지분 94%를 보유한 예금보험공사의 공적자금 회수에 있다. 일반적인 기업 상장과 달리 상장자금이 회사의 성장 등에 활용되지 않는다. 더욱이 상장 이후 예보의 단계적 지분매각 계획에 따른 오버행(대규모 잠재매물) 이슈도 신규 주주들에게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이어 에코프로그룹 계열사인 에코프로머티리얼즈가 유가증권시장에 출격한다. 에코프로머티리얼즈는 지난 22일 한국거래소 예비심사를 통과해 본격적인 상장 준비 절차에 들어갔다. 에코프로그룹 가운데 유일한 유가증권시장 상장종목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에코프로머티리얼즈는 국내 최대 전구체 양산능력을 보유한 2차전지 소재 전문기업이다. 하이니켈 전구체가 주력 제품으로, IPO 자금 대부분을 생산설비에 투입해 늘어나는 전구체 수요에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공모 예정가는 3만6200~4만6000원, 예상 시가총액은 2조5746억~3조2716억원이다. 10월 30일~11월 3일까지 수요예측 진행 후 11월 8일~9일 일반청약에 나선다. 지난해 매출액 6652억원, 올 상반기 5241억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156억원, 91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거둬들였다. 대표 주관사는 미래에셋증권이며, 공동주관사는 NH투자증권이다.
스포츠용품 제조사 동인기연도 한국거래소에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해 연내 상장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 회사는 글로벌 아웃도어브랜드 △아크테릭스 △그레고리 △파타고니아 등 40여개 브랜드의 배낭, 등산용품 등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다.
최대주주는 창업자인 정인수 대표(84%), 2대주주는 큐캐피탈파트너스와 JB자산운용이 설립한 큐씨피 제이비 기술 가치평가(15%)로 2019년 15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하며 IPO 추진을 약속했다. 이번 공모에서 2대주주의 투자금 회수를 위한 구주매출 비중이 40%가량으로 높을 전망이다.
바이오디젤 제조업체 디에스단석, 메디큐브·널디 브랜드를 보유한 뷰티 전문기업 에이피알도 이달 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에 상장 예비심사 청구서를 제출했다. 디에스단석은 폐배터리 재활용 신규사업에, 에이피알은 해외 신규 시장 진출 등에 나설 방침으로 몸값 1조원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외에 연내 IPO 후보군으로 거론됐던 LG CNS, SK에코플랜트, CJ올리브영 등은 아직 예심청구를 하지 않아 연내 상장 추진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위축된 시장 분위기 다시 살아날까
IPO 시장은 잇따른 대어급들의 등장으로 일단 활기를 찾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예년보다 많이 위축된 상황에서 어느 정도까지 회복할지는 미지수다.
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25일 기준 상장기업수는 총 77개사에 머물고 있다. 기간은 다소 다르지만 2021년(114개사)과 2022년(115개사) 전체 상장기업수와 비교하면 부진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2021년 20조원, 2022년 16조원을 넘어섰던 공모금액은 올 들어 지금껏 2조원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전체 상장기업의 81.8%는 공모금액 300억원 이하 기업이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는 현재까지 넥스틸이 유일하다. 에이피알까지 연내 상장을 마친다고 해도 IPO 활황기였던 2021년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종경 흥국증권 연구원은 "두산로보 흥행이 이후 등장할 대어급들의 상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도 "규모가 큰 기업들의 상장으로 시장 규모가 회복하고는 있지만 예년에 비해선 부진하다"고 진단했다.
이어 "에코머티리얼즈 등 예심을 통과한 기업들을 포함해 올해 코스피 상장사는 6개 내외에 그칠 것"이라며 "코스닥 상장은 많았지만 대부분 규모가 작아 공모 규모가 큰 폭으로 줄어든 점은 아쉽다"고 평가했다. 다만 내년 LG CNS, SK에코플랜트 등의 상장이 예정돼 있어 공모 규모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가격제한폭 확대 등 제도 개선…시장 안정화에 도움
신규 상장종목 가격 변동폭이 공모가 기준 60%에서 400%로 확대되는 등 제도가 개선된 점은 IPO 시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대어급 등장으로 상장일 소위 '따따블(공모가 대비 400% 상승)'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가격제한폭 확대 도입 초기인 6월 말부터 7월 중반까지는 상장 첫날 주가가 300% 이상 솟아오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등 등락이 컸지만 최근 들어 등락폭이 감소하며 첫날 가격발견 기능을 찾아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거래소 관계자는 "가격제한폭이 ±30%로 제한되는 방식에서는 빠른 속도로 매수물량을 과점하는 '상한가 굳히기' 주문 등으로 2~3일 동안은 가격발견이 어려웠다"면서 "가격제한폭 확대 이후 시장에서 수요공급을 통해 상장 첫날 신속하게 가격발견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가격제한폭 확대 실시 이후 초기에는 주가 변동이 크게 나타났으나 시간이 갈수록 안정화되고 있다"며 "중간에 변동성이 큰 종목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IPO 종목의 조기 가격 형성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종경 연구원은 "가격제한폭 확대 이후 일부에선 대형 종목 주가가 따따블까지 갈 것으로 예상하지만 이는 실상 합리적인 가격은 아니다"라면서 "가격제한폭 제도가 안착하면 장기적으로는 따상, 따따블 등의 시장 왜곡 현상은 사라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단 가격제한폭 확대로 이전보다 손실 구간이 커진 점은 투자자들이 주의할 부분이다. 기존 방식으로 시초가를 결정할 때는 하방이 공모가의 90%로 제한됐지만 이제는 40% 하락한 가격으로 거래를 시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가격제한폭 확대 안정화와 비교해 수요예측 기간을 늘린 부분은 아직까지 큰 효과를 보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일찍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에 물량을 우선 배정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제도가 전체적으로 안정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