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세대 위해 남겨둬야'(2018년) vs '미래 세대 주거 마련 위해 일부 해제'(2024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GB)에 대한 서울시의 관점이 뒤집혔습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 보전하던 땅을 그들을 위해 내놓기로 한 건데요. 그만큼 주택 공급 위축, 집값 상승 등에 따른 주거 불안 문제가 심각한 때라 판단했다고 풀이됩니다.
정부는 무려 12년 만에 대규모 수도권 GB를 해제해 '우수 입지'에 주택을 공급하기로 했는데요. 벌써부터 후보지로 예상되는 지역의 부동산이 들썩이고요. 입주 지연, 로또 청약 등의 부작용 우려도 나옵니다. 어라? 언젠가 본 상황 같은데요?
공급 충분하다며…한달 만에 '그린벨트' 해제
개발제한구역의 원형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금산(禁山) 제도'입니다. 무분별한 벌목을 막기 위해 특정 지역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한 제도죠. 현대판 금산 제도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개발제한구역으로 태어났습니다. 수도권 등 도심 집중화와 이로 인한 도시 확산을 막기 위한 제도로요.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주택 및 개발용지 부족, 원주민 보상 문제 등이 생깁니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대선공약을 계기로 GB 해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죠.
그 이후로 정부는 GB를 종종 만져 왔는데요. 2012년 보금자리주택을 공급하면서 대규모 GB를 해제한 이후로는 수도권 GB는 아주 작게만 건드려 왔습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GB 사수'를 강하게 밀어붙인 영향이 컸죠.
문재인 정부에서도 집값 급등세를 막기 위해 GB를 풀고자 했는데요. 박 전 시장이 재임하던 시절 서울시는 "그린벨트는 미래 세대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마지막까지 고민해야 할 영역"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GB 해제를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2022년부터는 금리 인상, 주택 경기 위축 등으로 집값 상승세가 꺾이면서 GB 해제 필요성도 쏙 들어갔습니다. 지난해 12월부터는 서울 집값(한국부동산원 통계)이 하락 전환해서 15주째 마이너스 기록하자 정부는 이를 '안정화'로 보기도 했고요.
그러나 서울 집값은 올 3월 다시 반등했습니다. 공사비 증액에 따른 갈등으로 도심 주요 정비사업에 차질이 생겼고요. 전세사기 등 여파로 비아파트 시장은 공급이 확 줄면서 주택 시장 전반에 공급 위축 우려가 짙어졌죠.
이 가운데 공사비 인상에 발맞춰 분양가가 고공행진을 하면서 집값은 '지금이 제일 싸다'는 인식이 번졌고요. 결국 서울을 중심으로 집값이 꿈틀대고, 전셋값은 불안이 더 빨리 찾아왔죠.
그럼에도 정부는 "공급은 충분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불과 지난달만 해도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수도권 중심으로 제기되는 '공급 우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는데요. ▷관련 기사:[기자수첩]주택 공급, 정말 충분한가요?(7월24일)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8·8 주택공급 활성화 대책'에서 GB 해제 방안을 담아 발표했습니다. GB를 향한 관점을 확 바꿔서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저출생으로 인한 인구 소멸의 위기를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정상적 집값 상승으로 보금자리 마련의 꿈이 더욱 멀어지고 있다"고 짚었습니다.
그러면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미래 세대의 주거 마련을 위해 개발제한구역의 일부 해제를 검토하는 것은 피치 못할 선택"이라며 서울 GB 해제를 결정하게 된 배경을 밝혔습니다.
'옛날 생각나네'…"신중하게 풀어야"
8·8 대책에선 수도권 GB를 풀어 8만가구를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일반 주택 사업에 비해 토지 보상 등이 수월하다는 점을 들어 빠른 주택 공급이 가능하다고 봤는데요.
후보지는 11월에 공개하기로 하고 일단 광범위하게 토지거래허가구역을 지정해놨습니다. 서울에서 1만 가구 이상을 GB를 활용해 풀기로 하면서 서울 GB 전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었고요.
서울과 인접한 경기 지역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습니다. 국토부가 지정한 경기도 토지거래허가구역은 하남 감일동, 감북동, 초이동, 감이동 등인데요. 벌써부터 이들 지역과 인접 지역의 부동산 시장에 투자 문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각종 부동산 커뮤니티를 보면 '정부가 좌표를 찍어준다'며 GB 해제 예상 후보지나 인근 지역을 투자 지역으로 공유하고 있죠. 주택 시장 안정을 위해 꺼낸 카드가 오히려 시장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공급 효과에 대한 의문도 나옵니다. GB 해제를 한다고 해도 입주까지 10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당장 공급 안정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요. 사업 추진 과정에서 토지 보상, 사업성 등에서 변수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우려는 2012년에 이미 경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주택 공급 확대 일환으로 '보금자리주택'이라는 공공주택 상품을 내놨는데요. GB를 일부 활용해 택지를 조성한 뒤 보금자리주택을 대거 공급키로 했고요.
2009년 5월 서울 강남세곡, 서초우면, 하남미사, 고양원흥 등 4곳을 시작으로 공급을 시작해 주택 시장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일부 단지는 분양가를 시세의 절반 수준으로 책정한 데다, 사전예약을 받아 수요 분산도 했거든요.
그러나 일부 지역은 지역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단지별로 보상 문제 등으로 인해 본청약 및 입주 지연 등의 '잡음'이 나왔습니다. 입주 시점에 가격이 올라 소수에게 '로또 청약' 이득을 안긴 것도 논란이 됐고요.
강남구 세곡동 한 보금자리주택의 경우 전용면적 59㎡가 2억2000만원에 분양했는데요. 전매제한이 끝난 2015년엔 매매 시세가 6억원에 달했고요. 지금은 12억원대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밖에 광범위한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으로 인한 사유 재산 침해, 녹지 부족 등의 문제도 그때나 지금이나 제기되고 있는 우려인데요. 결국 12년 전에 있었던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 12년 후에도 나오지 않은 셈이죠.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과거에도 GB를 풀어 보금자리주택을 공급했지만 집값 안정 효과가 없었고, 경기가 안 좋아서 조정을 받은 정도였다"며 "지금 수도권 GB를 풀어 주택을 공급한다 해도 워낙 수요가 많고 입주까지 멀어 시장 안정 역할을 얼마나 할지는 미지수"라고 봤습니다.
두성규 목민경제연구소 대표도 "GB 해제 후 공급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결국 다음 정부로 넘어가게 되는 만큼 책임 있게 끌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아울러 강남에서 분양하는 주택은 결국 중산층에게 또다른 투자 기회를 주는 꼴이 되기 때문에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