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4년 전만 해도 배터리 업계는 말 그대로 '호황'이었다. 주식시장은 이차전지 기술력이 있는 기업들에게 투자금을 대기 시작했고 세계 주요국에서도 각종 세제혜택 등을 제공했다. 당연히 실적 증가가 뒤따랐다.
작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전기차 대중화가 배터리 업계를 이끌어 왔는데 절대 다수의 소비자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수요가 정체되기 시작하면서다. 캐즘이다. 이에 더해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이 심화하면서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가 시장을 교란시켰다.
올해 역시 시계제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강화를 예고한 데다가 전기차 수요를 종전보다 더욱 억누르는 정책을 예고하면서다.
다만 위기는 기회가 될 가능성도 높다. 미국과 중국의 팽팽한 긴장감 사이에서 중국이 주춤한 사이 국내 배터리 업계가 경쟁력을 키워 나간다면 오히려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강산 바뀌는데는 10년도 안걸렸다
2022년 초 LG에너지솔루션이 코스피에 입성했을 당시 주식시장은 뜨거웠다. 2022년 1월 27일 LG에너지솔루션은 50만5000원에 거래를 마치며 증시에 데뷔했다. 따상(시초가를 공모가의 2배에 형성한 뒤 상한가)에는 실패했지만 입성 첫날 시가총액 118조1700억원을 달성, 삼성전자에 이은 시가총액 2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금융투자업계는 LG에너지솔루션을 비롯한 배터리 업계에 열광했다. 친환경이 전 세계를 흔드는 아젠다로 자리잡으면서 전기차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다. 전기차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인 배터리 역시 전기차 열풍을 등에 업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2023년까지도 이같은 장밋빛 현실은 이어졌다. 배터리 업계는 연간 최고 실적을 갈아치우면서 승승장구했다.
찬란했던 2~3년이 전과 다르게 지난해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대부분 적자로 전환했고 비상경영을 선언했다. 강산이 바뀌는데는 10년이 아닌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상황을 바꾼 것은 전기차에 대한 수요가 일시적으로 꺾이는 '캐즘'의 영향이 컸다. 전기차가 등장한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어느정도 대중화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는 있지만 다수의 소비자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기차는 아직까지는 새로운 수요자를 찾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관측된다. 배터리업계 역시 전기차 시장 흐름에 따라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중국과 미국의 무역분쟁이 본격화 하면서 배터리가 새로운 전략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배터리업계가 지난해부터 우울한 시기를 보낸 원인으로 꼽힌다.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싼 가격의 배터리가 수요를 넘어설 정도로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국가 수준의 출혈경쟁이 이어진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재등장, 더 복잡해진 '판'
지난해 어지러웠던 배터리 업계 판도는 올해 더욱 복잡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배터리 업계에 우울한 정책을 예고하면서다.
먼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바이든 전 대통령이 펼쳤던 전기차에 대한 정책을 180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내 판매되는 신차 중 전기차 비중을 50%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던 정책을 폐기했다.
여기에 더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폐지해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축소도 예고한 상황이다. IRA 폐지의 경우 미국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현재 트럼프 행정부에서 활발하게 국회 설득 작업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이미 전기차 캐즘으로 시름했던 배터리 업계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나 다름없다.
아울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친환경'을 거스르는 과거로의 회귀를 시사한 점 역시 불안요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석유와 같은 에너지 자원 개발 및 수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친환경에 대한 목소리가 작아지면 이같은 기조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자연스럽게 배터리 시장의 경쟁력이 퇴색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은 미·중 패권다툼…동아줄은 있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시장을 암울하게 만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결국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러닝 메이트나 다름없던 일론 머스크가 전기차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테슬라의 CEO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같은 분석이 힘을 얻는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 전기차 시장이 호황을 맞으면서 가장 수혜를 본 곳은 중국의 배터리 기업 CATL이었다"라며 "바이든 정부때도 중국과의 마찰이 심화하면서 미국이 견제를 이어갔지만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로 중국 주도의 시장을 바꾸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기차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등 관점을 바꿔 이를 견제하겠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나라 배터리 업계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있는 사업 감각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난 17일 한국배터리산업협회와 법무법인 율촌이 주관한 '미 트럼프 신행정부 배터리 정책 대응 세미나'에서 박태성 한국배터리산업협회 상임 부회장은 "트럼프 정책 방향은 불확실성과 위협 요인이 되기도 되지만, 현재 미국 현지 생산 체제 구축 중에 있는 우리 기업들에게 기회 요인도 많이 있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대미 배터리 최대 투자 국가이면서 이같은 투자 성과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시기에 성과가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이를 미국 당국에 적극 알릴 필요가 있다는 게 박태성 부회장의 설명이다.
안정혜 율촌 변호사는 "중국의 CATL이 만약 미국 시장에서 약해진다면 그 수익을 우리 기업이 받을 가능성이 높다"라며 "미국의 중국 견제를 잘 활용하되 이에 따른 유탄을 맞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제조업 기업들의 공정 중 상당 부분이 중국에서 이뤄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중국과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이와 동시에 가격과 함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해 장기적인 생존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실제 배터리 업계는 지난해 녹록지 않았음에도 R&D 예산을 늘리면서 장기적인 시계로 현 상황에 대응하는 모습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산업 육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박태성 부회장은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국회와 정부가 정책금융 확충, R&D 예산 분배 투자, 세액 공제, 직접 환급 제도 도입과 함께 사용 후 배터리 입법 지원에 보다 많은 도움과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