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 상장을 추진해 왔던 마켓컬리의 운영사 컬리가 국내 증시 상장으로 계획을 바꿨다. 기대보다 낮은 밸류에이션(기업가치)과 한국거래소의 적극적인 유니콘 기업 유치 행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컬리는 상장 추진에 앞서 2000억원대의 투자도 유치했다. 이 투자금을 사업 확장에 활용해 기업 가치를 높일 계획이다.
마켓컬리의 운영사 컬리는 2254억원 규모의 시리즈 F 투자유치를 마무리하고, 향후 국내 상장을 추진하겠다고 9일 밝혔다. 이번 시리즈 F 투자에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중 하나인 밀레니엄 매니지먼트와 CJ대한통운 등이 신규 투자자로 참여했다.
컬리는 이번 투자금을 기술 개발에 적극 투자할 계획이다. 상품발주·재고관리·배송 등 물류 전반의 효율성과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데이터 인프라에 집중하겠다는 설명이다. 주요 경쟁력인 '새벽배송'에도 투자한다. 지난 5월 충청권에서 시작한 새벽배송을 하반기 남부권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업계는 컬리가 국내 증시 상장을 선택한 이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당초 컬리는 미국 시장 상장을 적극 추진해 왔다. 국내 증시는 재무 건전성을 높이 평가한다. 컬리는 2015년 29억원이던 매출을 지난해 9523억원으로 키웠지만 수익성은 계속 악화됐다. 이 탓에 국내 상장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면 미국 증시는 '성장성'에 무게를 둔다. 컬리는 빠른 성장세가 강점이다. 비록 적자가 지속하고 있지만 성장세를 감안하면 머지 않아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컬리는 이를 앞세워 미국 증시 상장을 준비해왔다. 미국 증시가 차등의결권을 인정하는 점도 컬리에겐 매력적이었다. 현재 김슬아 컬리 대표는 약 6.67%의 컬리 지분만을 보유하고 있다.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차등의결권이 필요하다.
다만 컬리의 기대보다 낮은 기업가치가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컬리는 당초 3조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 투자에서 컬리의 기업가치는 약 2조5000억원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이정도 기업가치로는 미국 증시에 입성하더라도 크게 주목받을 수 없다는 평가다. 컬리에 앞서 미국 증시에 상장한 쿠팡의 기업가치는 한때 100조원에 육박했다.
신선식품에 치중돼 있는 포트폴리오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증시 상장을 앞둔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혁신성' 및 '글로벌 영향력'이다. 쿠팡은 상장 당시 글로벌 3위 규모인 한국 이커머스 시장 내 지배력과 로켓배송의 혁신성을 적극 어필했다. 미국 증시 상장 이야기가 나오는 야놀자나 네이버웹툰 등은 글로벌 영향력 측면에서 높게 평가받을 여지가 있다.
반면 컬리가 자랑하는 신선식품 새벽배송 역량은 현재 국내에서도 일부 지역에만 해당된다. 즉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강점이 마땅치 않다는 이야기다. 신세계의 SSG닷컴, 현대백화점, 오아시스마켓 등 경쟁사도 빠르게 뒤쫓고 있다. 시장 내 입지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컬리가 호텔·레저 등을 대안으로 육성하고 있지만 아직 초기 단계다. 미국 자본시장의 관심을 끌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내 증시 상장 요건이 컬리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한국거래소는 성장 잠재력이 큰 기업의 해외 유출 막기에 주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3월 유가증권시장 상장 규정을 완화했다. 시가총액 1조원만 넘으면 다른 재무적 요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상장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에는 2015년 설립 이후 계속 적자를 내고 있는 제주맥주가 '테슬라 요건'으로 상장에 성공했다. 연평균 1.5배의 매출 성장이 기준을 충족시켰다. 컬리는 현재 매년 두 배에 가까운 매출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취급 품목 확대로 향후 매출 성장도 노려볼 만 하다. 미국 상장에 비해 높은 관심을 받으며 국내 증시에 입성할 가능성이 높다.
김슬아 컬리 대표는 "이번 투자 유치는 컬리가 지난 수십년간 오프라인에 머무르던 소비자들의 장보기 습관을 온라인으로 전환시킨 점, 생산·유통 과정에 데이터와 기술을 도입한 점을 높게 평가받은 것"이라며 "이번 투자를 기반으로 생산자와 상생협력에 힘쓰고 기술투자와 우수한 인재 유치로 고객 가치를 높여 시장 혁신을 선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