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생소하다
요즘 롯데백화점이 무척 어수선합니다. 롯데백화점 곳곳에서 다양한 소식들이 전해지는데요. 그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들의 교집합이 바로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라는 점입니다. 정 대표가 화제인 것은 당연합니다. 정 대표는 '신세계' 출신이거든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최근 있었던 인사에서 정통 신세계 출신인 정 대표를 롯데백화점의 수장으로 앉혔습니다.
롯데백화점은 롯데그룹에게 상징적인 곳입니다. 그룹의 핵심 사업인 유통사업을 이끄는 헤드쿼터입니다. 그런 곳에 경쟁사 출신을 앉혔으니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롯데그룹은 그동안 롯데백화점 대표 자리에는 늘 롯데 출신만을 고집했습니다. 그만큼 '순혈주의'가 강한 곳입니다. 비단 대표뿐만 아닙니다. 롯데백화점이라는 조직 자체가 순혈주의로 똘똘 뭉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롯데백화점의 수장 자리에 외부 인사가, 그것도 경쟁사 출신이 앉았으니 내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최근 롯데백화점 내부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입니다. 우선 업무보고부터 난리입니다. 정 대표는 기존과 달리 각 부문장 등 임원들에게 20~25분가량의 업무보고 시간을 줬습니다. 하지만 기존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임원들은 업무보고 시간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예전에는 프레젠테이션 양식에 맞춰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를 들고 가서 읽고 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대표도 임원들도 익숙한 방식이죠. 하지만 정 대표가 요구하는 것은 달랐습니다. 핵심만 요약해서 목표와 개선점만을 요구했습니다. 기존 방식으로 업무보고를 들어간 임원들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업무보고 시간은 길어졌고 준비하는 실무진들도 새롭게 방향을 짜야했다는 후문입니다.
다르다
업무보고는 단적인 예일뿐입니다. 정 대표는 기존 대표들과 달리 캐주얼 미팅을 즐깁니다. 소규모로 여러 집단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거기서 나온 내용들을 모아 종합적인 판단을 거쳐 사업 계획에 반영합니다. 분명 기존 롯데백화점 대표들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정 대표가 이런 방식을 지향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변화'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정 대표는 최근 사내 인트라넷에서 소통에 나섰습니다. 대표의 글에 답글들도 달리기 시작했죠. 그 답글에 정 대표가 다시 답글을 달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인트라넷에 '주노모하니'라는 게시판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했습니다. 주노모하니는 정 대표가 임직원들과 인트라넷에서 허심탄회하게 소통을 하기 위한 장(場)입니다. 내부와의 소통에 힘을 주겠다는 정 대표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업계에서 정 대표는 '불도저'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력한 추진력 탓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하지만 정 대표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의 말은 조금 다릅니다. 정 대표는 표현이 직설적입니다. '돌직구'입니다. 그러다 보니 생긴 오해라는 전언입니다. 신세계 근무 시절에도 돌직구로 유명했다는 후문입니다. 다만 신세계에서는 이런 돌직구가 높은 평가를 받았던 반면 롯데에서는 이런 표현이 아직 어색합니다.
롯데의 기업문화는 잘 아시다시피 '보수적'입니다. 개인보다는 조직이 우선입니다. 개인의 감정이나 취향을 앞세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런 조직 문화는 조직 내의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나의 의견보다 다른 사람이 우선입니다.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입니다. 정 대표의 돌직구는 롯데백화점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많이 달랐을 겁니다.
'경고장'을 날리다
정 대표는 최근 사내 인트라넷에 취임 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인사 방식도 기존과 다릅니다. 영상을 올렸습니다. 제목은 '두유노 주노'. 영상에서 정 대표는 무척 소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동안 알려진 강인한 이미지와는 정 반대입니다. 심지어 영상에서의 표현이나 제스처도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편안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모습으로 롯데백화점 임직원들에게 부탁과 당부의 말을 전합니다.
정 대표는 롯데백화점에 만연해있는 문제점들을 이미 파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상에서 웃으면서 던지는 그의 메시지 하나하나의 무게가 무척 무겁습니다. 그는 우선 '조직문화'를 화두로 던집니다. 정 대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인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를 거론합니다. 지금의 롯데백화점이 이 영화 제목과 같다고 강조합니다. 과거의 1등에 취해 변화에 능동적이지 못했던 롯데백화점을 지적합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잘했던 경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잘하는 것에서부터 용기 있게 다시 시작하자"고 당부했습니다. 이어 조직문화에 대해 "숨 쉬는 공기와 같다"면서 "가장 부정적인 조직문화는 상명하복이다.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고 시키기만 하는 사람은 더 위험한 사람"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왠지 익숙한 문화입니다. 맞습니다. 롯데의 기업문화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더 강력합니다. 그는 "윗사람 눈치만 보고 정치적으로 행동해 후배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리더, 지시만 하며 직원들을 힘들게 하는 팀장, 점포를 쥐어짜기만 하는 본사의 갑질 등은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정 대표가 그동안 롯데백화점에 만연해있는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은 겁니다. 그가 이미 파악을 끝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강남에서 1등 점포 만든다"
더불어 그는 몇 가지 중요한 전략도 공표합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강남에서 1등 점포를 만들겠다"입니다. 정 대표는 "고급 소비의 중심인 강남 고객들에게 인정받는 점포가 있어야 한다"면서 "강남에서의 성공 경험이 타 점포로 확산되도록 할 것"이라고 밝힙니다. 사실 그동안 롯데백화점은 강남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이 승승장구할 때도 구경만 해야 했죠. 이를 지적한 겁니다.
정 대표는 "잠실점과 강남점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롯데백화점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고 신세계백화점 강남점과는 다른 고급스러움을 넘어선 세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1등 롯데백화점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강남 지역에 역점을 두겠다고 선언한 것은 의미가 꽤 큽니다. 롯데백화점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롯데백화점의 이미지는 이제 대형마트와 같습니다.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이 각자 차별화 전략을 통해 자신들만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것과 달리 롯데백화점은 보유하고 있는 잠재력에도 불구, 상품 구성이나 서비스 방식 등에서 점차 중심에서 밀려났습니다. 정 대표는 이런 점을 지적하고 나선 겁니다. 어찌 보면 롯데백화점에 오랜 기간 켜켜이 쌓인 안일함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그는 '고객 만족'에 대해 "철저하고 광(狂)적으로 고객만족에 집중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인사제도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할 것임을 암시했습니다. 키워드는 '전문가 양성'입니다. 그는 "그동안은 2~3년에 한 번씩 업무를 조정해 다양한 경험은 하지만 특정 분야에 전문성은 갖지 못했다"면서 "앞으로는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분들이 업계의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습니다.
전략 키워드는 'A·B·C·D'
정 대표는 향후 롯데백화점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한 전략 키워드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키워드는 총 4가지로 'A·B·C·D'입니다. 그가 제시한 키워드를 풀어보면 A(Agility·유연한 사고를 바탕으로 빠르게 결정하고 실행), B(Being proactive·미리 대비), C(Creative·창의적), D(Design is everyting, every where·생각하는 방식도 자기만의 세련된 디자인 필요)입니다.
그의 'ABCD 전략'을 잘 뜯어보면 롯데백화점 임직원들에게 그가 바라는 인재상이 담겨있습니다. 곱씹어 보면 지금껏 롯데백화점이 보여줬던 것과는 정 반대의 것들이 많습니다. 이는 정 대표의 향후 행보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그는 "이번만큼은 조직문화부터 확실하게 바뀔 것이고 많은 영역에서 전략적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정 대표 선임은 롯데백화점에 변화를 주기 위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취한 특단의 조치입니다. 그에게 혁신을 위한 전권을 쥐여줬습니다. 롯데그룹의 근간인 롯데백화점에서부터 혁신이 이뤄지지 않으면 롯데그룹 전체의 혁신은 기대할 수 없다는 신 회장의 의지가 오롯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편안하고 친근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롯데백화점 임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간 선택한 단어와 눈빛이 비장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정 대표가 이번 영상에서 했던 말 중 계속 귓가를 맴도는 것이 있습니다. "나 롯데백화점 다녀"라는 말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입니다. 수십 년간 국내 백화점 1등이었던, 지금도 1등이지만 진짜 1등인지는 의심스러운 롯데백화점이 다시 진정한 1등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정 대표의 강력한 쇄신과 변화의 성공 여부에 그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이제 공은 롯데백화점 임직원에게 넘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