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유통]은 한주간 유통·식음료 업계에서 있었던 주요 이슈들을 쉽고 재미있게 정리해 드리는 콘텐츠입니다. 뉴스 뒤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사건들과 미처 기사로 풀어내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편집자]
Chief Executive Officer
어릴 때는 대표이사, CEO라는 자리가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그냥 대표이사, 사장 같은 직함이 일반적이었는데 언젠가부턴 CEO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더군요. 무조건적인 영어 찬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이 더 '멋있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아무튼 CEO는 오너 일가가 아닌 바에야 직장인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의 정점일 겁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CEO가 돼 회사를 진두지휘하는 꿈을 꾸겠죠. 가끔 해외 기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CEO가 된 사람'같은 기사를 보면 그게 나중에 내 얘기가 될까 싶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다 보니 CEO 자리가 그렇게 멋있기만 하고 좋기만 한 자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직장인들은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외치지만 CEO에게 그런 말은 언감생심이겠죠. 주말도 보장받지 못할 겁니다. 물론 재택근무 같은 건 꿈도 못 꾸겠죠.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 건 갑자기 날아오는 경질 소식일 겁니다. 평범한 직장인은 고용노동법의 보호를 받아 해고 전 통지가 필요하지만, CEO들은 하루아침에 방을 빼야 하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네. 신세계그룹 이야기를 하려는 겁니다. 이번주에만 2명의 CEO가 교체됐습니다. 지난 3월 신세계건설을 포함하면 올해에만 3명의 CEO가 옷을 벗었죠. 신세계그룹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주간유통]에서 알아봅니다.
약 주고 병 주고
시작은 지난 3월입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총괄부회장이 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정 부회장, 아니 정 회장의 취임 후 첫 행보는 이마트의 사상 첫 적자 원흉이었던 신세계건설의 정두영 대표 경질이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또 하나의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SSG닷컴의 이인영 대표와 G마켓의 전항일 대표가 나란히 물러났습니다. 그룹 이커머스 사업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겁니다.
이번 인사는 정 회장의 경영 방향성 전환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세계그룹은 최근 CJ그룹과 손잡고 그룹 이커머스 물류를 CJ에 맡기기로 했죠. 이커머스의 핵심 경쟁력이 물류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 회장은 SSG닷컴과 G마켓이 힘을 합쳐도 쿠팡이나 네이버쇼핑과 경쟁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물류 부문을 국내 최대 물류 기업인 CJ대한통운에 맡기고 원래 잘 하는 그로서리와 상품 개발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거죠.
기존 대표이사들을 경질하고 새로 부임한 CEO들의 면면을 보면 정 회장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SSG닷컴 대표가 된 최훈학 본부장은 그룹 내 마케팅 전문가이자 PB전문가, 그로서리 전문가로 알려졌습니다. SSG닷컴이 '뭘 팔아야 할 지' 재정립하자는 의미입니다. G마켓의 새 대표가 된 정형권 전 알리바바코리아 총괄은 재무 전문가입니다. 알리바바에 가기 전에는 골드만삭스, 크레딧스위스 등 글로벌 투자은행에서 일했습니다. 시그널은 명백합니다. 엉망이 된 G마켓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라는 겁니다.
숫자만 보면 정 회장의 인사는 납득이 갑니다. G마켓은 2021년 인수 후 지금까지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죠. 이커머스 시장 내 위상도 낮아졌습니다. SSG닷컴은 상장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1조원짜리 폭탄을 안게 됐습니다. 최고 경영자가 책임져야 할 상황입니다. 신세계건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1878억원의 적자를 냈습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의 직격탄을 맞았죠. CEO가 책임을 져 마땅한 상황입니다.
'신상필벌' 찝찝한 이유
정두영 대표가 물러날 당시 신세계는 보도자료에 '경질'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례적인 일입니다. 보통은 '일신상의 사유로 물러나' 등의 간접적인 표현을 쓰거든요. 이번 인사가 책임을 묻는 인사였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겁니다. 물러난 건 정 대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업본부장과 영업담당도 동시에 '경질'됐죠. 이번 SSG닷컴·G마켓 때는 경질이라는 표현은 피해갔지만 대신 '물갈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경질만큼 강력한 단어입니다.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세 명의 대표 교체 인사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 대표는 경질 1주일 전인 3월 말 정기주주총회에서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연임 바로 그 다음주에 경질된 겁니다. 이인영 SSG닷컴 대표는 지난해 3월 강희석 대표와 함께 SSG닷컴 공동 대표가 됐습니다. 그리고 9월 정기 인사에서 강 대표가 물러나면서 단독 대표 자리에 올랐죠. 정기 임원 인사에서 SSG닷컴을 책임지라는 명을 받은 겁니다. 그리고 9개월 후 경질됐습니다. G마켓 인수 전부터 자리를 지켰던 전항일 대표 역시 지난해 9월 정기 임원인사에서 살아남았지만, 그게 '생명 연장'의 이유는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CEO는 언제든 책임을 지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회사의 실패 책임을 떠안는 게 CEO의 역할 중 하나죠. 하지만 이런 예고 없는 해임은 좋을 게 없습니다. 앞서 진행한 재신임이나 정기인사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정용진 회장입니다. G마켓 인수는 정 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사업입니다. 주변의 우려에 "얼마가 아니라, 얼마짜리로 만들 수 있느냐가 의사결정 기준"이라는 명언도 남겼죠. SSG닷컴 역시 정 회장이 추진한 사업입니다. 계열사의 실패에는 정 회장의 지분도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CEO가 한 기업의 최고 경영자라면 회장은 그룹 전체의 최고 경영자입니다. 그룹의 모든 방향성을 결정하는 회장이라면, 신상필벌을 강조하며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평가자보다는 "내가 함께 책임지겠다"고 말하고 해결책을 찾는 리더가 돼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바라는 '용진이형'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