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는 지난달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모범규준을 내놨다. KB금융 사태를 계기로 흉한 민낯을 드러낸 금융권의 왜곡된 지배구조를 확 뜯어고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지배구조 모범규준은 시작도 하기 전에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비선 실세 논란과 함께 정부 스스로 금융권 인사 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탓이다.
그러면서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임직원 인사에도 정치적 인맥을 동원하는 난맥상이 우려되고 있다. 제2의 KB금융 사태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는 뜻이다.
◇ 정치(政治) 인사로 모범규준 흔들
금융위는 금융권 사외이사 선임 요건을 강화해 이사회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또 CEO 승계 프로그램을 마련해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제대로 된 CEO를 뽑을 수 있도록 모범규준을 정비했다.
하지만 최근 ‘정치(政治) 인사’ 논란은 모범규준의 취지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정부 스스로 최소한의 형식과 절차도 갖추지 않은 채 정체불명의 방식으로 낙하산을 내려보내면서 그 근간을 허물어버린 탓이다.
실제로 은행연합회장은 물론 우리은행장 선임 과정은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CEO를 뽑는 위원들조차 후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정설이 나왔고, 숱한 논란에도 결과는 그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
◇ 무원칙하고 불투명한 인사가 문제
물론 정부가 소유한 공공기관이나 금융회사에 대해 정부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뚜렷한 기준이나 원칙이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투명성도 낙제 수준이다. CEO 추천위원은 물론 추천 과정과 이유를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금융권 인사 역시 보이지 않는 비선 실세로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되면서 혼란과 불확실성을 더 키우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금융위는 청와대의 메신저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 외압을 조율하면서 CEO 추천과정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하기보단 가장 앞서서 눈치 보기에 바빴다는 얘기다. 사전에 내정설을 흘리면서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20일 열린 금융발전심의회에서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 지배구조 선진화 시작부터 구멍
청와대와 정부가 금융권 인사를 전리품인 양 챙겨주다 보니 금융위가 내놓은 지배구조 선진화의 명분도 사실상 없어졌다. 정부 스스로 무원칙한 인사로 지배구조 선진화를 위한 명분과 원칙을 무시하다 보니 제대로 영이 설 리 없다.
전선은 이미 뚫리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먼저 총대를 멨다. 금융권 CEO와 임원을 임원후보추천위원회가 추천한 사람 중에서 뽑으라는 규정에 딴죽을 걸고 나섰다. 대주주의 인사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금융위도 지배구조 모범규준 시행을 일단 연기하면서 결국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재계의 거센 반발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금융위 자신도 그만큼 명분이 취약했던 탓이다.
◇ KB 사태 언제든지 재연될 수도
‘정치(政治) 인사’ 논란은 기존 금융회사도 파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낙하산 CEO는 또 다른 낙하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청와대가 CEO는 물론 금융권 임원 인사까지 만기친람식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 결국 CEO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게 된다. 인사철만 되면 각종 연줄과 배경을 동원하면서 인사 판이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최근 금융권 CEO는 물론 부행장과 임원, 사외이사 인사까지 줄 대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권 관계자는 “세월호와 KB 사태 후 관피아와 관치(官治) 대신 정피아와 정치(政治)가 금융 판을 흔들고 있다”면서 “이런 식이면 또 다른 KB 사태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