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금융의 경영진 분쟁과 사외이사 문제에서 출발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가이드라인이 결국 절름발이로 출발한다. 금융위원회는 24일 정례회의를 열어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강한 반발에 막혀 은행권만 먼저 이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기로 했다. 제2금융권은 “은행의 제도 정착을 봐가며 중장기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혀, 사실상 폐기한 것으로 해석한다.
나머지는 이미 발표 내용에서 크게 바뀐 것은 없다. 은행계 지주회사와 은행의 사외이사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늘리고 연차보고서 공시시기를 정기주총 30일 전에서 20일 전으로 조금 여유를 준 것이 전부다. 처음부터 임원추천위원회 구성이 핵심이었는데, 이것이 은행만 적용하고 보험•증권•카드•캐피탈 등 2금융권은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날 정례회의의 최종 결정이다.
◇ 재벌의 인사권•주주권 침해 반발에 결국…
지난달 금융당국의 지배구조 모범규준이 발표되자마자 재벌계열 계열사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전경련을 통해 인사권과 주주권을 침해한다는 불만을 조목조목 따졌다. 솔직히 이미 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오너와 대주주 입장에서 임원 인사권을 제3의 기구 같은 곳에 넘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설사 그것이 형식적인 그리고 절차적인 형식 요건이라 하더라도 용납하기 힘든 것임은 분명하다.
이처럼 강하게 반발하자 금융위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재벌계가 금융업에 진출해 있는 2금융권에는 적용 자체를 연기하는 것이다. 말이 연기지 사실상 폐기한 것으로 해석한다. 말 잘 듣고 지배권을 행사하는 주주가 분명치 않은 은행권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지배구조 모범규준이 시작부터 절름발이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주주권과 인사권과 관제(官制) 가이드라인의 충돌은 앞으로도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막말로 은행이 이 규준을 지키지 않아도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은행도 엄연히 상법상 주식회사여서 주총에서 승인을 받으면 그만이다. 법보다 주먹이 더 무섭다는 현실만 극복할 수 있다면 아무런 강제력이 없는 가이드라인이다.
◇ 한국식 가이드라인은 결국 손톱 밑 가시
이처럼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논란인 것은 아무런 지위가 없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 후 가이드라인과 베스트 프랙티스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상당수가 법률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 미국식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긴 하지만, 실제 운용하는 미국과의 처지가 다르다. 대체로 법원의 판례를 근거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그저 관제 지침일 뿐이다.
그때그때 땜질로 국회를 거쳐야 하는 복잡한 법률 대신 손쉬운 방식을 찾다 보니 가이드라인과 베스트 프랙틱스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왔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언제나 ‘검사권’이다. ‘들어가 먼지 한번 털어보겠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는 우리나라 은행들이다. 아무런 법률적 지위가 없이도 가이드라인이 작동하는 이유다. 이렇게 규제는 쌓여가고, 경영의 자율성과 창의성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금융업의 특성상 관치(官治)를 완전히 부정하긴 힘들지만, 그것은 매우 제한적으로 쓰여야 한다. 흔히 말하듯이 금융시장의 시스템 붕괴가 우려될 때에 한에 쓰여야만 관치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규제는 적용하는 데도 매우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시장 참여자들이 공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때마다 논란이 될 것이다. 은행의 한 관계자는 “결국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람이 임원이 되면 가이드라인을 지킨 것이고 아니면 그렇지 않게 되는 국면”이라고 꼬집었다. 출발부터 절름발이인 이 가이드라인은 아마도 그때그때 다른 가이드라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