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왼쪽)이 작년 금융행정혁신위원장 시절 최종구 금융위원장(오른쪽)과 함께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금융위 제공] |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여론을 더 들어보겠다는 입장이다. 저보다 좀 더 보수적이지 않을까 한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 상급기관인 금융위원회의 최종구 위원장에 대해 '보수적'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9일 금융감독혁신 과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다. 물론 전체적인 성향을 보수적이라 단정하지는 않았다. 근로자추천이사제에 대해 최 위원장이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윤 원장의 판단이다.
보수가 나쁜 것도 진보가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타인에 의해 보수 프레임이 씌워진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촛불정부'의 금융당국 수장이라면 더 그렇다.
근로자추천이사제는 노동자가 추천하는 사람이 경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노조가 추천한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참석하는 다소 파격적인 제도다. 노동이사제(근로자이사제)는 '노동자 대표'가 경영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KB국민은행 노조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사외이사를 추천했지만 선임에는 실패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신한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등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윤 원장은 작년말 금융위 민간자문기구인 금융행정혁신위원회(이하 혁신위) 위원장 때 금융권에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을 권고했다. 윤 원장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근로자추천이사제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셈이다. 당장 사무금융서비스노조가 이번 금감원 혁신과제에 대해 "작년 혁신위 권고안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평했다.
작년말 최종구 위원장은 "노사문제 전반에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혁신위의 권고에 대해 사실상 거부했다. 근로자추천이사제 뿐만아니라 키코 재조사 등 위원회 일부 권고에 대해 최 위원장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혁신위가 4개월만에 해산되고 위원장을 맡았던 윤 원장은 민간인 신분이 되면서 근로자추천이사제 등은 서서히 동력을 잃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돌아왔다. 최흥식·김기식 등 전 금감원장이 잇따라 낙마하면서 춘천에서 조용히 노후를 보내던 윤 원장이 금감원장이 된 것이다. 이번 금융감독혁신 과제는 작년말 최 위원장의 '완곡한 거부 의사'에 대해 윤 원장이 7개월만에 내놓은 답변이다. 윤 원장은 "최 위원장은 여론을 더 들어보겠다는 입장"이라며 "그 부분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 속도를 늦추겠다"고 말했다.
윤 원장이 근로자추천이사제에 대해 한발 물러 선 것처럼 들리지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다. 핵심은 윤 원장이 동력을 잃은 근로자추천이사제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는 데 있다. 금감원은 올해 4분기 근로자추천이사제 공청회를 열고 내년 금융사 지배구조 경영실태평가때 사외이사 후보군의 다양성을 집중 점검할 계획이다. 점검 대상인 다양성에는 근로자 추천 인사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개월간 윤 원장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금감원 임직원들은 그에 대해 "젠틀하지만 철학과 소신이 확실하다"고 평가했다. 윤 원장은 최 위원장을 향해서도 '예의는 지키되 소신은 버리지 않는' 발언을 했다. 키코 재조사,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 등에 대해서도 두사람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한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두사람이 철학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협력적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철학을 공유하지 못하는 금융당국 수장들이 어쩔수 없이 손을 잡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철학이 다른 두사람이 손을 잡을 수도,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갈림길에 이르러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면 두사람은 손을 놓을 가능성이 높다. 윤 원장은 근로자추천이사제, 키코 등 작년말에 밝혔던 생각이 7개월 뒤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이제는 최 위원장이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