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의 자금 흐름이 바뀌고 있다. 은행에서 빠져나가는(대출) 돈이 줄어들고 들어오는(수신) 돈은 늘어나고 있다. 당장 유동 자금이 갈 만한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보니 그렇다. 은행이 일시적으로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향후 자금 흐름이 어떻게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관측이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 이 같은 흐름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은행 가계대출 줄고 정기예금 늘고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1월말 기준 가계대출 잔액은 707조6895억원으로 작년말(709조489억원) 대비 0.2% 감소했다. 가계대출 잔액이 전달보다 줄어든 것은 지난해 5월 이후 8개월 만이다.
가계대출 잔액이 줄어든 것은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로 올해부터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2단계가 적용되는 등 대출 문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준금리 인상 등의 여파로 부동산 시장도 크게 위축되면서 주택 매매도 둔화, 그동안 가계대출 증가에 가장 큰 영향을 줬던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이 감소한 영향도 크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주담대는 분할상환이 대부분인데 올들어 신규 대출이 줄면서 상환액이 대출금보다 많아졌고, 결과적으로 가계대출 잔액이 감소했다"며 "신용대출 역시 이자부담은 물론 대출가능액이 줄어 가계대출 감소에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반면 은행에 돈을 맡기는 사람은 늘고 있다. 은행들의 수신액이 증가한 가운데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정기예금 잔액이다. 금리인상 기조에 따라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 불안이 확산되고 있지만, 예금은 종전보다 기대할 수 있는 이자수익이 늘어난 까닭이다.
금리가 오르면 원하는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정기예금으로 목돈이 들어온다는 게 은행권의 설명이다. 실제 지난달 말 기준 시중 5개 은행 정기예금 잔액은 666조7769억원으로 작년 말 대비 1.8% 증가했다. 5개 은행 모두 정기예금 잔액이 증가한 가운데 우리은행이 5.7%로 증가폭이 가장 컸다.
바뀐 자금 흐름, 언제까지?
이처럼 은행에서 흘러나가는 돈보다 은행으로 들어오는 돈이 많아지다보니 시중 자금 흐름이 둔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무엇보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한 차례 인상한 데 이어 앞으로 연내 2번 정도 추가 인상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와 맞물려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은 둔화 흐름도 나타난다. 한국부동산원이 집계하는 주간 단위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은 지난 1월 마지막주 2년4개월 만에 보합 전환했다. 코스피 지수도 작년 고점 대비 20% 안팎 떨어진 상황이다.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 시장 역시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투자처의 위험을 피해 은행으로 자금이 유입되는 분위기가 짙어지는 것이다.
은행 입장에선 자금조달 방안 중 하나인 예‧적금 등에 적용되는 수신금리가 높아진 상황에서 수신규모가 증가하면 이전보다 자금조달 부담이 커진다. 은행의 금리부담이 커진 만큼 이는 대출 이자에도 반영돼 대출금리가 높아지게 된다. ▷관련기사: [인사이드 스토리]기준금리 같은데, 대출금리 왜 더 높나(2월2일)
대출이 위축되면 은행의 성장에도 제약을 받게 된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돈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실물경제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다만 최근 자금 흐름은 연말‧연초라는 시기적 특수성과 함께 자산시장 불안 등 일시적 요인이 겹쳐있다. 이런 이유로 장기적인 자금 흐름은 좀 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최근 은행들의 여신금액 감소와 수신금액 증가는 연말 성과급 지급 등 특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며 "특히 주식과 부동산 시장 불안으로 적당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금이 은행을 일시적인 대피처로 바라본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