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소송 판결을 앞두고 자동차는 물론 산업계에 위기론이 거세다. 핵심 쟁점은 ‘신의성실의 원칙’ 이른바 ‘신의칙(信義則)’이다. 수용 여부에 따라 자동차업계의 명운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① 도대체 신의칙이 뭐길래….
신의칙이란 ‘법률관계 당사자는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해야 하고,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근대사법의 대원칙이다. 특정 내용을 다루는 법에 국한된 것이 아닌 모든 법 영역에 적용될 여지가 있는 추상적인 일반 규범이다.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3년 ‘갑을오토텍’ 판결부터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고정성을 충족한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판시하면서도 ‘이에 대한 소급청구는 신의칙을 적용해 제한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즉 정기상여금 소급청구가 사용자(기업)의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면 정의와 형평 관념에 비춰 신의에 반하고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판결문 내용이었다.
② 신의칙에 달려있는 운명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면, 노조 조합원 2만7458명은 2011년 ‘연 750%인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연장근로 등 각종 수당을 다시 계산해 미지급 임금을 내 놓으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먼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려면 정기성과 일률성, 고정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일정한 간격(정기성)으로 모든 근로자(일률성)에게 특별한 조건 없이 지급(고정성)됐는지가 판단 기준이 된다.
이 중 고정성 요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2015년 통상임금 소송 판결에서 승소한 현대차의 경우, 상여금 시행세칙에 ‘2개월 동안 15일 이상 일한 노동자에게만 지급한다’는 규정이 있어 고정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반면 기아차는 시행세칙 없이 상여금을 지급해왔다. 특별한 조건이 없었던 까닭에 고정성을 충족, 상여금이 통상임금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기를 바라는 기아차 등 산업계에서는 판결의 또 다른 주요 쟁점인 신의칙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③ 신의칙 인정 사례
가장 최근인 지난 18일 광주고등법원 민사1부가 금호타이어 노조 조합원 4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부 역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하지만 회사의 경영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점으로 인해 추가임금 청구는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해 신의에 반한다’고 판시했다. 신의칙을 적용한 것이다.
이에 앞서 2015년에는 시영운수(1·2심)와 아시아나항공(2심)이, 지난해에는 현대중공업(2심)과 현대미포조선(2심), 한진중공업(1·2심) 등의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서 재판부가 신의칙을 인정한 바 있다.
신의칙이 주목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법원은 해당 기업이 처한 경영 위기 등을 고려해 신의칙을 적용했는데, 이들처럼 기아차가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다. 기아차는 올 상반기 영업이익 7868억원을 기록했다. 1년 전에 비해 44% 감소한 것으로 2010년 이후 7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판매 부진도 지속되고 있다. 올 1~7월 누적 글로벌 판매량은 153만6388대로 8.9% 줄었다. 현대·기아차가 올해 판매 목표로 세운 825만대 달성은 사실 상 물 건너 간지 오래다.
기아차는 통상임금 소송 패소 시, 재무제표 상 바로 충당금을 적립해야 하는 까닭에 당장 3분기부터 적자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여기에 회계평가 기준 기아차가 총 부담해야 하는 금액만 3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존립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④ 기아차 만의 문제일까
자동차 산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중요한 버팀목 중 하나다. 지난해 국내 13대 주력 수출품 수출액(3859억1800만달러) 가운데 자동차(406억3400만달러) 및 자동차 부품(244억4200만달러)이 차지한 비중은 약 16.9%이다. 해외 현지 생산을 통한 판매 등을 감안하면 자동차 산업이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 크다.
기아차는 현대차와 함께 국내 자동차 산업을 이끄는 기둥이다. 기아차와 함께 하는 1~3차 협력 부품업체만 약 3000개에 달하고, 이 중 1차 협력사에 지급되는 납품 금액만 16조7721억이다. 통상임금 소송 결과가 비단 기아차 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이와 함께 통상임금 범위가 확대될 경우 경제적 파장에 대한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12년 한국노동연구원 정진호 선임연구위원은 정기상여금 및 기타수당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면 노동비용이 향후 1년간 6조100억원, 지난 3년간에 대해서는 15조8000억원이 증가한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특정 대기업 노조의 임금 문제가 아닌 국가 경제적인 문제다.
⑤ 다시 신의칙을 돌아볼 때
신의칙은 모든 법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추상적인 규범이다. 다른 의미로는 모든 법의 가장 밑바탕에 신의칙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이 해당 기업에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고, 이로 인해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노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해당 기업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면 그 기업 노조원을 넘어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 그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춰 판결이 신의에 맞는 것인지가 가장 우선 돼야 한다.
이달 말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에 대한 1심 판결을 앞두고 통상임금의 법리적 해석에 앞서 신의칙 적용 여부가 더 부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