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7시 김포공항. 두산중공업 창원공장 방문을 위해 수속을 마치고 승장강에 들어서자 낯익은 이들이 보였다. 두산중공업외에 (주)두산, 두산인프라코어 등 두산그룹 홍보팀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평소 따듯하고 인간적인 이미지의 사람들이었던 터라 이들의 정갈한 수트 차림은 꽤 낯설었다. 최근 재계 전반으로 비즈니스 캐주얼이 확산되고 있어 특히나 이들의 정장 차림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게다가 두산그룹 계열사 홍보팀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도 익숙한 장면은 아니었다.
그만큼 이번 창원공장 방문의 의미가 크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그러보고니 두산그룹이 미디어를 대상으로 공장투어를 여는 일은 흔치 않은 일. 그래서일까. 늘 서글서글했던 이들의 표정조차 오늘 만큼은 꽤 비장해보였다.
이날은 두산중공업이 본사인 창원공장에서 6년간 공들여 개발한 '가스터빈'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날이었다. 언론에 첫 선을 보이는 것은 물론 두산그룹 직원들도 처음보는 자리다.
◇고난이도 기계기술의 복합체, 가스터빈 첫 선
두산중공업 창원공장 첫 발표는 이번 가스터빈 개발을 주도한 이광열 두산중공업 파워서비스BG GT개발·설계 담당 상무가 맡았다. 이 상무는 공학적 지식이 전무한 기자들에게 최대한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갑자기 나오는 전문 용어 극복이 과제였지만 그의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세밀했다.
발전용 가스터빈은 압축된 공기와 액화천연가스(LNG) 연료를 혼합·연소시켜 발생하는 고온·고압의 연소가스를 터빈의 블레이드(기체를 이동시키는 데 쓰이는 칼날 모양의 날개)를 통해 회전력으로 전환시키고, 터빈에 연결된 발전기를 통해 전기에너지를 생성하는 내연기관이다.
최근 탈원전을 선언한 정부 정책과 맞물려 급부상하는 소재로 LNG발전소의 핵심이다.
두산중공업은 최근 이 가스터빈 개발에 성공했다. 국내 최초이자, 전 세계적으로는 미국(GE), 독일(지멘스), 일본(미쓰비시히타치파워시스템), 이탈리아(안살도)에 이어 5번째다.
이 상무 발표에 따르면 두산중공업이 개발한 가스터빈 모델명은 DGT6-300H S1로, 출력 270MW, 복합발전효율 60% 이상의 대용량, 고효율 가스터빈이다. 출력만 놓고 보면 동급 최강 수준이다.
또한 친환경적이다. 가스발전(LNG)의 초미세먼지(PM 2.5) 배출은 석탄발전의 8분의 1, 황산화물·질소산화물 등 대기오염물질은 석탄발전의 3분의 1 이하 수준에 불과하다.
부품수는 총 4만여개. 특히 가스터빈 내부에는 총 450개 이르는 블레이드가 달려 있는데 1개 가격이 중형차 1대 가격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 블레이드들은 1500℃ 이상에서도 충분히 견뎌낸다. 금속 중 1500℃ 이상을 견디는 금속이 흔치 않기 때문에 두산중공업은 창원공장내 아예 고온부품 공장을 만들었다. 또 녹는점이 가장 높은 니켈 베이스의 '슈퍼 알로이 초합금을 사용, 블레이드 제조에 성공했다.
다만 가스터빈이 가동할 때 블레이드들은 3600RPM의 속도로 회전하는데, 이 때 머리카락 두가닥 정도의 진동이 발생해도 바로 가동을 중단해야 할만큼 예민하다. 두산중공업은 진동을 억제하기 위해 구성품들을 정밀하게 조합하는 '시스템 인테그레이션 기술'을 적용했다.
이밖에도 ▲대량의 공기를 24대1(최신 압축기 모델 기준)까지 압축하는 '축류형 압축기 기술'▲배출가스를 최소화하는 '연소기 기술' 등이 적용됐다. 한마디로 고난이도 기계기술의 복합체다.
이 상무는 "발전용 가스터빈은 '기계공학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며 "제트엔진을 모태로 출발했지만 시장의 요구에 따라 급격한 기술발전을 이뤄내면서 이젠 항공용 제트엔진의 기술력을 넘어섰다"고 강조했다.
◇"불가능하다고 했는데.."가스터빈 국산화 성공
이 상무 다음으로는 이번 가스터빈 개발의 총괄 책임을 맡은 목진원 두산중공업 파워서비스 BG장(부사장)의 발표가 이어졌다.
목 부사장은 연단에 오르자마자 상기된 목소리로 "오늘은 수많은 시행 착오 속에서 한국형 가스터빈 모델을 생산한 꽤 의미있는 날"이라며 "2000년대 후반, 원천 기술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 속에서 가스터빈 사업을 마지막 플랜으로 삼았다"면서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모두가 제트엔진 기술을 보유한 국가가 아니라면 가스터빈 개발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본 끝에 가스터빈 국산화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두산중공업은 당초 가스터빈 기술을 보유하기 위해 이탈리아 업체인 안살도 인수합병(M&A)을 추진, 합의 단계까지 성사시켰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부가 핵심 전략 자산을 외국에 넘길 수 없다며 양사 간 합의를 무산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는 두산중공업이 가스터빈을 자체 개발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두산중공업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2013년부터 정부와 함께 한국형 표준 가스터빈 개발 국책과제를 진행했다. 정부가 약 600억원을 지원했고 두산중공업이 연구개발비로 1조원을 투자했다. 여기에 21개의 국내 대학, 4개의 정부 출연 연구소, 13개의 중소·중견기업과 발전사 등이 힘을 더했다.
두산중공업에 이어 정부까지 나서서 가스터빈 자체 개발에 목을 멘 건 현재 국내 발전소에서 운영되는 가스터빈(149기) 전량이 모두 수입산이기 때문이다. 수입산은 구매비용만 8조원. 부대비용까지 포함하면 약 12조원에 달한다.
자체 개발에만 성공하면 12조원의 국부 유출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의 시장 형성도 기대할 수 있다.
목 부사장은 "가스터빈이 필요한 신규 복합발전소는 2030년까지 약 18GW 규모로 건설될 전망"이라며 "18GW복합발전소 증설에 국내산 가스터빈을 사용할 경우 약 10조원의 수입 대체 효과가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미디어브리핑이 끝난 후에는 앞서 들은 가스터빈 부품 등 개발하는 공장으로 이동했다. 공장 내부를 돌아다녀야 하는 만큼 안전모와 함께 직원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송수신기가 각각 지급됐다.
다만 두산중공업은 이곳부터 기자들의 사진 촬영을 일절 금지시켰다. 가스터빈 자체가 아무나 만들고, 누구에게나 공개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닌 만큼 외부 노출을 극히 꺼리는 듯 했다.
실제로 가스터빈 기술을 보유한 미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핵심적인 국가 전략 상품인 만큼 기술유출을 극도로 제한한다. 국내 발전소에서 가스터빈 보수작업을 할때도 해외 메이커는 국내 고객사 마저도 작업 상황을 볼 수 없도록 차단막을 치고 작업할 정도라고 한다.
공장 투어 끝에 마침내 이날의 주인공인 가스터빈이 공개됐다. 국내 최초의 가스터빈인 데다 두산그룹의 새 먹거리라는 점에서 기자들 뿐만 아니라 직원들까지 숨죽여 이를 바라봤다. 이날 아침 그룹 홍보팀의 비장함과 수트 차림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후발주자라는 게 더 장점...주력사업으로 키울 것"
이날 선보인 가스터빈은 이제 자체 성능시험과 시운전을 거쳐 한국서부발전이 추진하는 500MW급 김포열병합발전소에 공급된다. 첫 상용운전은 2023년께로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두산중공업은 가스터빈을 회사 주력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이미 미국 플로리다, 스위스 바덴에는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했다. 창원 본사에는 1000억원 이상의 정격부하(Full Speed Full Load) 시험장도 마련됐다. 시험장에서 3000개 이상의 센서를 통해 가스터빈의 진동, 음력, 압력 등을 모니터링하는 종합적인 성능시험이 가능하다고 한다.
가스터빈 부가 사업 진출에도 속도를 낼 예정이다. 가스터빈 제조사들은 기기 공급뿐만 아니라 공급 후 유지보수, 부품교체 등의 서비스 사업을 통해서도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2017년 미국에서 가스터빈 핵심부품에 대한 정비와 부품교체, 성능개선 등 서비스 사업을 운영하는 DTS(Doosan Turbomachinery Services)를 인수했다. DTS는 국내 대부분의 상업운전 가스터빈 모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중공업은 이를 통해 오는 2026년까지 연매출 3조원 이상의 수출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두산중공업 관계자는 "2026년 세계 가스터빈 시장 점유율 7%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연평균 3만명 이상의 고용 효과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다만 후발주자라는 점은 불안요소다. 그러나 두산중공업은 오히려 후발주자라는 점이 더 장점이라고 주장한다. 앞서 관계자는 "선발주자들의 제품에 대한 단점, 고객사들의 불만을 반영해 성능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당당함의 근거는 후속모델에 있다. 두산중공업은 이날 선보인 모델 대비 출력을 더 높인 후속모델(DGT6-300H S2, 출력 380MW)를 개발 중에 있다. 해당 모델의 복합화력효율 목표는 62%이상. 이는 국내에 들여오는 수입산 가스터빈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와 더불어 신재생 발전의 단점으로 꼽히는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한 100MW급 중형 모델 개발도 함께 추진 중이다.
박지원 두산중공업 회장은"격변하는 시장 환경속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다각화하는 노력을 펼쳤는데 오랜 노력 끝에 발전용 가스터빈을 개발하게 됐다"면서 "이번 가스터빈 개발은 국내 230여개 중소·중견기업이 참여하는 산업 생태계 구축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