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재계는 간단치 않은 경영 환경을 맞고 있다.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은 풀리지 않았고 주요 기업 내부에도 해결할 과제가 산적했다. 소의 해, 신축(申丑)년을 호시우보(虎視牛步)로 뚫어야 할 대기업집단 총수들의 머릿속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최고경영자(CEO)들의 경영 과제와 판단의 방향을 신년사 등에서 엿보이는 열쇳말과 함께 들여다봤다.[편집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새해 행보는 예년처럼 담담해 보인다. 지난 4~6일 사흘간 경기도 평택 반도체 신규라인과 수원사업장, 서울 우면동 삼성리서치를 찾아 사업을 점검했다. 속은 답답할지언정 내색할 수 없다. 그는 삼성리서치에서 가전·스마트폰 등 세트 부문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며 "오로지 회사의 가치를 높이고 사회에 기여하는 데 전념하자. 선두 기업으로서 몇십 배, 몇백 배 책임감을 갖자"고 당부했다.
묵묵한 행보의 배경에는 올해를 기점으로 재계 1위 대기업집단 삼성의 10년, 20년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거취의 불확실성과 격동의 경영환경 변화 속에 주력사업 하나하나가 흔들리지 않도록 기본을 다지는 게 당장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
◇ 이재용, 그의 머릿속
이 부회장은 오는 18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2019년 8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사건이 파기환송된 이후 500여일 만, 2017년 2월 특검의 법정구속으로 시작해 1심과 2심을 거친 걸 감안하면 3년11개월째 진행되고 있는 재판의 막바지다. 이 선고 결과에 따라 이 부회장의 거취가 갈리게 된다.
재판부는 삼성의 준법감시제도 개선을 양형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징역 5년 이상이 선고되면 이 부회장은 재수감을 피할 수 없다. 앞서 지난해 12월30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부회장에 대해 징역 9년을 구형했다. 특검은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실효성이 인정되더라도 징역 5년 이하의 형을 선고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부회장은 결심공판 때 최후진술에서 머릿속을 낱낱이 드러냈다. 그는 재판부에 "1년 가까운 수감생활 포함해 4년간 조사 재판 시간이 소중한 성찰의 계기가 됐다"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개인적 이익을 취하지 않고 오로지 회사 가치를 높이고 사회에 기여하는 일만 하겠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포토]3년10개월 '국정농단' 재판 최후진술 나서는 이재용
그는 "삼성이 준법을 넘어 최고 수준의 투명성과 도덕성을 갖춘 회사가 되게 만들겠다. 모두가 철저하게 준법감시 틀 안에 있는 회사로 만들겠다"며 "저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어떤 조직도 삼성에서는 결코 예외로 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최후진술에서 작년 10월 별세한 부친 이건희 회장까지 앞에 두고 다짐하기도 했다. 영결식 추도사에서 선대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아 삼성을 키운 이 회장에게 '승어부(勝於父)'라는 표현이 나온 것을 거론한 대목이다. 승어부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이 더 큰 효도라는 뜻이다.
그는 "그 가르침이 제 머릿속을 강렬하게 맴돈다. 하지만 제가 꿈꾸는 승어부는 더 큰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본다"면서 "저의 정신자세와 회사 문화를 바꾸고 여러 제도를 바꾸며 외부 여러 부당한 압력이 들어와도 거부하는 준법감시제도를 만들겠다. 삼성 임직원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모든 국민들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 또 다른 재판, 그리고 상속
파기환송심 선고 결과는 예단하기 어렵다. 부회장이 실형을 면할 경우 4년간 이어진 오너이자 최고경영자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일부 해소돼 경영 정상화가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이 부회장은 아직 공판이 시작도 하지 않은 삼성물산 합병 관련 재판도 앞두고 있다. 이 재판 역시 극적인 상황 변동이 없다면 4~5년 가량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정농단 재판에서 이 부회장이 긍정적 결과를 받아 들더라도 이 재판에 계속 대응해야 하는 것은 이 부회장 개인뿐만 아니라 삼성에 큰 골칫거리다.
삼성은 고(故) 이건희 회장 유산 상속이라는 지배구조 면에서의 거대변수도 맞닥뜨리고 있다. 유족 사이에서야 정리가 됐을 테지만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은 변수다. 20조원에 달하는 이 회장 보유 주식이 어떻게 유족들에게 나뉘느냐에 따라 국내 최대 대기업집단 삼성의 미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 관련기사☞ [이건희, 지다]상속·지배구조 최대변수는 '유언장'
일각에서는 삼성의 경영권 안정을 위해 이재용 부회장에게 더 많은 주식재산이 배분됐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를 감안한다면 이 부회장이 지고 있는 사법리스크의 무게는 더 클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 코로나 한복판…전자 빼고는 '흔들'
삼성전자를 제외하고는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경영 상황은 간단치 않다. 삼성전자의 경우 작년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도 불구하고 전년보다 30% 늘린 약 36조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올해도 불안요인은 있지만 반도체 시황 호조와 스마트폰·가전 분야 비용 감축을 고려하면 다시 작년보다 30%가량 영업익을 늘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다른 계열사들은 감염병 후폭풍 여파가 적잖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삼성전기·삼성SDI·삼성SDS·삼성물산·삼성중공업·삼성엔지니어링·호텔신라·제일기획·에스원 등 9개 삼성그룹 상장계열사의 작년 1~3분기 누적 영업이익은 1조8310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31.9% 감소했다. 삼성중공업과 호텔신라는 각각 7690억원, 1501억원 영업적자다.
삼성전자에서는 현재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미래 먹거리를 위해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M&A) 등의 경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역할이 이 부회장에게 요구된다. 시스템 반도체, 6세대 이동통신(6G) 네트워크, QD(퀀텀닷) 디스플레이,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등 이미 계획된 신수종이다. 다른 계열사의 경우 이 부회장이 직접 경영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얽혀 있는 그룹 지배구조를 볼 때 주요 사안들이 그의 손 밖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사법 리스크가 잦아들고 오는 4월께 선친 유산 배분이 마무리되면 한화와 롯데에 각각 방산·석유·화학사업을 매각한 뒤 5년여 중단된 사업조정도 재개될 가능성도 크다. 올 한해 이 부회장의 거취나 의사결정에 따라 삼성의 10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오는 건 이런 상황들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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