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사업계획을 짜다 보면, 본사는 물량을 높이자고 욕심내고 현장(현지법인)은 방어적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반대다. 현장에선 더 달라고 하는데, 본사는 못 주겠다고 한다."
주우정 기아 재경본부장(부사장)은 내년 사업계획을 짜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런 내부사정을 전했다. 27일 열린 기아 기업설명회(IR)에서다. 강력한 수요에 주문은 쌓여있지만 반도체 수급난에 물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벌어지는 기현상이다. 주 부사장은 "내년 사업계획은 공급이 이슈"이라고 짚었다.
"재고마저 털렸다"
이날 기아가 밝힌 전세계 판매량을 보면 기아에 강력한 제품 수요가 몰리고 있다는 점이 증명된다. 지난 3분기 기아의 글로벌 현지판매는 74만5000대로 전년동기 대비 1.3% 늘었다. 증가율은 소폭에 그치지만 이 기간 전세계 산업 수요가 10.1%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선방한 실적이다.
이혜인 IR 팀장은 "인기 차종의 신차 효과가 오래 가고 있고, 반도체 수급 불균형을 최소화하며 가용 재고를 최대한 활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 덕분에 지난 3분기 실적도 '기대 이상'이었다. 지난 3분기 영업이익은 1조3270억원으로 전년동기대비 579.7% 증가했다. 수익성이 크게 개선된 것은 작년 3분기 기아가 반영한 1조2600억원대 품질비용 탓이다. 이 품질비용을 제외한 작년 3분기 영업이익(1조2080억원)과 비교하더라도 9.8% 증가한 호실적이다.
지난 3분기 매출은 17조7528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8.8% 증가했다. 반도체 수급난 속에서도 내실과 규모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하지만 공급은 수요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지난 3분기 기아의 총 도매 판매는 69만9000대로 전년동기 대비 2.1% 감소했다. 지역별로 나눠보면 △국내 –8.6% △북미 –1.9% △중국 –55.2% 등이다. 최종 소비자로의 소매 판매는 늘었지만 판매상(딜러)으로의 도매 판매는 부진했던 것이다. ▷관련기사: [포스트]차 판매량, 출고-도매-소매 차이는?(2018년 10월12일)
주 부사장은 "지난 3분기 생산은 극히 저조했다"며 "그간 생산이 저조하더라도 파이프라인(재고)을 활용해 도매를 잘 지켰지만, 이번엔 파이프라인도 말랐다"고 전했다.
기아가 반도체 수급난 속에서 선방했지만 아쉬워하는 이유다. 주 부사장은 "손익, 도·소매 판매 등 누계 기록은 전년동기 대비 앞서나가고 있지만 내부적인 목표와 비교하면 욕심만큼, 기대만큼 미치지 못하는 결과"라고 전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 지났다
차가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은 오는 4분기에는 어느 정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주 부사장은 "지난 9월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며 "9월보다는 10월이 낫고, 11~12월은 10월보다 나을 것으로 예측된다"고 전했다.
반도체 수급난이 풀리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주 부사장은 "반도체 이슈가 내년 상반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된다"며 "다만 수요가 단단하게 뒷받침되는 상황이라 내년에 생산 차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이슈"라고 강조했다.
기아는 글로벌 생산 확대를 추진 중이다. 주 부사장은 "인도 공장은 2교대를 3교대로 늘리고 싶지만 반도체를 수급하지 못하고 있다"며 "빠른 시일 내에 3교대로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공장에서 텔루라이드(북미 전용 SUV)를 10만대 증산했지만 부족하다"며 "추가 증산을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두둑한 현금…배당은 '아직?'
이날 IR에선 기아가 보유한 현금에 대한 관심도 이어졌다. 지난 3분기 말 기준 기아의 '현금(현금과 현금성 자산, 단기금융상품, 단기매도가능금융자산)'은 17조8950억원으로 작년 말 대비 21.6% 증가했다. 기아의 전체 자산 중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7.7%에 이른다.
기아 입장에선 유동성 확보로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하지만 주주 입장에선 배당 확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날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실적은 좋은데 주가가 박스권에 갇혀있다"며 "주주환원정책으로 이익을 나눠야 주가가 박스권을 뚫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주 부사장은 "여전히 리스크를 대비하고 2025년까지 높은 수준의 유동성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당장 배당을 확대할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은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