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미국 반도체 회사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합병(M&A)을 위한 9부 능선을 넘었다. 중국 당국이 14개월 만에 합병을 승인하면서, 경쟁 당국의 심사가 마무리됐다.
SK하이닉스는 인수를 위한 1단계 절차를 이른 시일 내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인수 시점은 2025년이지만, 회계규칙 상 1단계 절차가 종료되면 해당 사업 부문의 실적은 SK하이닉스로 넘어오게 된다. 이에 시장에서는 내년 SK하이닉스의 실적 급성장을 예상하며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中, 14개월 만에 인수 허가
SK하이닉스는 전날(22일)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SAMR)으로부터 인텔 낸드 및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사업 인수에 대한 합병 허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0월 인텔의 낸드 사업을 90억 달러(약 10조7000억원)에 인수하기로 계약했다. 인수를 위해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해 미국, 대만, 브라질, 영국, 싱가포르, 유럽연합(EU) 8개 관할국가의 공정당국으로부터 반독점 심사를 받아야 한다.
작년 말에 미국을 시작으로 대부분 나라에서 기업 결합 승인을 받았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만 1년 넘도록 승인을 내지 않았다.
업계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다툼이 SK하이닉스의 인텔 인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했다. 대규모 인수합병의 경우 이해관계가 얽힌 주요 국가에서 반독점 심사를 받아야 한다. M&A를 통해 몸집을 키운 기업이 해당 국가의 시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중국은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주요 M&A에 대한 승인을 지연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의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 인수에 대한 승인을 9개월 이상 미루면서 거래를 무산시켰고, 지난해 미국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암(ARM) 인수도 아직 승인을 내지 않은 상태다.
중국이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사업 인수를 승인한 것은 실리를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주요 장비 반입에 제동을 걸어 반도체의 국산화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에서, SK하이닉스가 인텔을 인수하는 것이 자국의 공급망 관리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즉, 중국이 자국 내 반도체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사업 인수를 승인했다는 해석이다. SK하이닉스는 이번 승인으로 중국 다롄의 인텔 공장 자산을 확보하게 된다. 다롄 공장의 '주인'이 미국 인텔에서 SK하이닉스로 바뀌게 되니, 중국은 미국을 의식하지 않고 반도체 사업을 유지할 수 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는 한국과 미국, 중국 모두 윈윈(Win-win)하는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인텔이 보유했던 다롄 공장에 SK하이닉스를 들여 투자를 이어갈 수 있고, 미국은 인텔이 중국 대신 자국 투자를 확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이득이라는 것이다.
또 인텔의 낸드 사업부를 인수하게 되면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낸드플래시 시장점유율 2위 기업에 등극하게 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3분기 기준 SK하이닉스의 글로벌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은 13.5%로 3위다. 여기에 인텔의 시장점유율(5.9%)을 단순 합산하면 현재 기준 2위인 일본의 키옥시아(19.3%)보다 높은 19.4%다.
이를 1위인 삼성전자(34.5%)의 시장 점유율과 합하면 국내 기업의 낸드 시장 점유율은 50%를 넘기게 된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국산 제품에 대한 위상이 한층 높아질 수 있는 셈이다.
최태원 회장 입김 컸다
이번 중국 측 심사 승인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 회장은 그간 △베이징포럼 △상하이포럼 △남경포럼 등을 매년 개최하며 쌓아온 정·재계 네트워크를 활용해 승인을 측면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다.
업계에 따르면 최 회장은 지난 9월 서진우 부회장을 중국사업총괄로 임명, 우시·다롄 정부 주요 관계자들을 만나 중앙정부에 SK하이닉스의 인텔 인수 승인 필요성을 역설하도록 했다. 중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도 만나 한중 양국에 도움이 되는 인수합병임을 적극 알리도록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지난 2017년 일본 키옥시아 지분 투자에 대한 중국 승인 심사 때는 최 회장이 직접 중국을 방문해 투자 필요성을 역설,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SK하이닉스 측은 "중국 당국의 심사 승인을 환영한다"며 "남은 절차를 잘 진행해 회사의 낸드 및 SSD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자회사에 9.5조원 투입
각국의 승인 절차가 마무리되면서 SK하이닉스는 본격적인 인수 절차에 돌입한다. SK하이닉스가 이번 중국 승인 이후 곧바로 이사회를 열어 자회사들에 자금을 투입하기로 한 것도 그 일환이다. 인텔에 낸드 사업부 인수 대금을 납부하기 위해서다. SK하이닉스는 1차 인수 대금인 70억 달러(약 8조3200억원)를 1차로 지급해야 한다. ▷관련기사: SK하이닉스, 인텔 낸드 인수 '해 넘길까'(11월29일)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 사업 인수를 위해 올해 11개국에 15개 해외법인을 신설한 바 있다. SK하이닉스는 이중 중국 다롄에 위치한 'SK하이닉스 세미컨덕터(SK hynix Semiconductor)'에 5조389억원을 대여한다고 공시했다. 인수자금과 운영자금 조달이 목적이다. 대여기간은 내년 13일부터 2023년 7월12일까지다. 자금 대여는 이 기간에 대여 금액 한도 내에서 분할해 지급될 예정이다.
이와 동시에 3조978억원의 유상증자도 진행한다. 대금 납입일은 오는 24일이다. 같은 날 미국 자회사 'SK하이닉스 낸드프로덕트솔루션(SK hynix NAND Product Solutions)'에 대한 1조3512억원의 유상증자도 진행한다. 이중 1조1533억원은 인수 대금, 1978억원은 운영 자금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중국 측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총 9조4879억원의 금액을 움직인 셈이다.
인수 대금 납부 후 1차 클로징을 마치면 SK하이닉스는 인텔로부터 지식재산권(IP) 및 직원 등 SSD 사업과 중국 다롄 공장 자산을 이전받는다. 해당 부분 실적도 SK하이닉스로 반영된다.
SK하이닉스가 이른 시일 내 1차 클로징을 마치겠다는 포부를 드러낸 만큼, 시장에서는 내년 실적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인텔 낸드 사업부 중 인수 대상 사업의 실적만 연 5조~6조원 수준이다. 이는 SK하이닉스의 지난해 연간 매출액(31조9004억원)의 15~18% 수준이다.
하나금융투자는 중국의 인수 합병 승인이 SK하이닉스 주가에 긍정적이라고 판단하고 목표주가를 13만원에서 16만3000원으로 대폭 상향 조정했다.
김경민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내년 실적에 인텔 낸드 사업부 실적이 추가된다고 가정하면 내년 SK하이닉스의 연간 매출은 53조3000억원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