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 규제당국이 오리지널 의약품과 바이오시밀러 간 '교차처방(인터체인저블)'을 전면 허용했습니다. 유럽의약품청(EMA)과 유럽의약품안전관리기구연합체(HMA)는 지난 19일 유럽연합(EU)에서 승인한 바이오시밀러의 교차처방을 허용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는데요. 이에 따라 약사는 의사의 의견을 따로 구하지 않고도 의사가 처방한 오리지널 의약품을 같은 효능을 가진 바이오시밀러로 바꿔 환자에게 처방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 많은 환자에게 바이오 의약품은 '그림의 떡' 같은 존재였습니다. 바이오 의약품은 동물세포나 효모, 대장균 등 생물체를 이용해 만든 의약품입니다. 자가세포나 조직 등을 이용한 첨단바이오 의약품은 합성 의약품보다 부작용이 적고 효과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죠. 또 세포·유전자 치료제는 암, 류머티즘성 관절염 같은 자가면역질환이나 난치질환 등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고요.
하지만 이들 의약품의 가격은 매우 비쌉니다. 높은 기술력을 갖춘 빅파마가 관련 시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국내에서 허가받은 노바티스의 '졸겐스마'는 한 번 투여하는 데 18억~25억원에 달합니다. 얼마 전 건강보험 적용이 결정된 키메릭항원수용체-T(CAR-T) 치료제 '킴리아'의 1회 투여 비용도 4억~5억원에 이릅니다. 공공의료보험 제도를 통해 어느 정도 접근성을 확보할 순 있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치료제가 있어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바이오 의약품의 높은 약값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이오시밀러입니다. 바이오시밀러는 특허가 만료된 바이오 의약품을 복제한 의약품으로, 오리지널 의약품보다 70~80%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습니다. 생산 비용이 줄어든 만큼 가격 역시 20~30% 저렴합니다. 빅파마가 독점했던 시장에 바이오시밀러가 속속 등장하면서 해당 오리지널 의약품의 가격까지 낮아졌고요. 유럽에선 2013년 기준 바이오시밀러로 인해 평균 1세대 바이오 의약품 가격이 약 20%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바이오시밀러의 개발과 처방을 권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미국은 바이오 의약품 소비액이 가장 높은 나라로 꼽힙니다. 2017년 미국에서 바이오 의약품은 전체 의약품 처방의 2%에 그쳤는데요. 현재 바이오 의약품 지출액은 전체 처방액의 37% 수준으로 불어났습니다. 바이오시밀러 처방이 확대되면 이런 재정적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미국 정책연구기관 랜드(RAND)는 바이오시밀러가 향후 5년 동안 미국 시장에서 55조원가량의 의료비를 절감할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당연히 환자의 입장에서도 치료 기회가 더욱 늘어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만 바이오시밀러는 바이오 의약품의 특성상 오리지널 의약품과 완전히 동일하게 복제할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초기 바이오시밀러 출시 당시에도 의사나 환자 사이에선 효능 상실이나 약물 내성을 우려해 오리지널 의약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고요. 실제 미국의 경우 생물학적 동등성*과 교차처방의 개념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있습니다. 교차처방을 위해선 바이오시밀러 허가를 위한 임상과 별개로, 오리지널과 바이오시밀러 의약품을 교대로 투여해도 안전성과 효능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입증해야 합니다.
*생물학적 동등성(생동성): 비슷한 조건에서 같은 용량을 투여했을 때 각 제제의 흡수량과 속도가 통계학적으로 동등하다는 뜻. 생동성 시험을 통과한 복제약은 오리지널 의약품과 동일한 효과를 낸다는 것을 보증받음
문제는 교차처방을 위해 추가로 들어가는 임상 비용입니다. 임상 비용이 늘면 바이오시밀러 개발 비용도 증가합니다. 이와 함께 약값도 오르게 되고요. 이럴 경우 바이오시밀러가 바이오 의약품의 약값을 낮추는 데 도움이 안 되겠죠. 유럽 규제당국은 교차처방을 허용해 바이오시밀러 개발 기업의 추가적인 임상 비용을 줄이고, 바이오시밀러 시장을 키우겠단 목표입니다. 참고로 유럽은 이제껏 교차처방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각 중앙정부가 교차처방 여부를 자율적으로 결정해왔습니다.
바이오 업계에선 이번 유럽 규제당국의 결정으로 바이오시밀러 시장이 한층 확대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도 바이오시밀러를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분위기고요. 앞서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해 8월 처음으로 비아트리스의 '셈글리(란투스 복제약)'에 대한 교차처방을 승인한 바 있습니다. 이어 베링거인겔하임의 '실테조(휴미라 복제약)', 코히러스의 '시멀리(루센티스 복제약)'에 대한 교차처방도 인정했습니다. 여기에 미국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도 바이오시밀러 시장 확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망입니다.
일각에선 국내에서도 바이오시밀러 처방 확대를 위해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셀트리온,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국내 바이오시밀러 개발 기업은 해외 시장에서 빠르게 입지를 넓히는 중입니다. 반면 국내 의료 현장에서 바이오시밀러 처방은 미미한데요. 국내 약가제도에 따르면 복제약 출시 후 오리지널 의약품의 약값은 최대 30%까지 낮아집니다. 이에 따라 환자가 부담하는 오리지널 의약품과 바이오시밀러 간 약값 차이가 거의 없게 되고요. 정부의 약값 통제로 바이오시밀러가 저렴한 가격의 이점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정부나 환자의 비용 절감 외에도 바이오산업의 성장 측면에서 바이오시밀러는 중요합니다. 기업에 있어 바이오시밀러 개발은 신약 개발의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셀트리온이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던 원동력도 바이오시밀러죠. 여러 국내 기업은 효능과 편의성을 개선한 '바이오베터'를 개발해 경쟁력을 강화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직 국내에선 바이오시밀러의 처방을 늘리기 위한 정부의 인센티브 정책이나 교차처방 관련 논의가 부족합니다. 바이오시밀러에 대한 의사와 환자의 인식도 바뀌어야 하고요. 이를 위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