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인더스토리는 매주 토요일, 한 주간 있었던 기업들의 주요 이슈를 깊고, 쉽고, 재미있게 파헤쳐 보는 코너입니다. 인더스트리(산업)에 스토리(이야기)를 입혀 해당 이슈 뒤에 감춰진 이야기들과 기업들의 속내를 살펴봅니다. [편집자]
GM대우의 추억
16년 전 산업부 기자로 배치되면서 처음 담당했던 곳이 자동차 업계였습니다. 당시 국내 자동차 업계는 수입차 업체들이 국내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던 시기였습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도 이를 방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죠. 처음 자동차 업계를 출입할 당시 현재의 한국GM은 'GM대우'였습니다. 대우자동차를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가 인수하면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GM대우는 나름대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현대차와 기아차(당시 사명)가 국내 시장을 꽉 잡고 있었지만 GM대우도 대우차 시절부터 쌓아온 명성과 시장 지배력으로 꽤 잘나가던 자동차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GM대우의 국내 시장 지배력은 약화됐습니다. 다양한 차종을 선보였지만 국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GM대우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의 경험을 주기 위해'라는 명분 하에 글로벌 GM 라인업에서 생산하던 차량들을 국내에 들여왔습니다. 새턴(Saturn)과 오펠(Opel) 브랜드의 스포츠카 'G2X', 호주 홀덴(Holden) 브랜드의 대형 세단 '스테이츠맨'과 '베리타스' 등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판매량은 저조했고 결국 철수했습니다. GM대우에게는 무척 아픈 기억으로 남은 차량들입니다.
오랜 기간 판매 부진으로 신음하던 GM대우는 결국 '돼지코'로 불리던 GM대우의 마크를 떼고 GM의 브랜드인 '쉐보레'를 들여옵니다. 이후 지금까지 '쉐보레'를 국내에서 생산, 판매하고 있죠. GM이 대우차를 인수한 이후 지금껏 계속되고 있는 논란 중 하나는 GM이 한국GM을 글로벌 생산 기지 중 하나로 역할을 축소하려 한다는 의혹입니다. 이에 대해 GM은 "한국은 중요한 시장"이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아 논란을 더욱 키우기도 했습니다.
GM 한국사업장
며칠 전 후배기자에게 물었습니다. 오랜만에 자동차 업계 담당기자로 돌아온 터라 물어볼 것이 많았습니다. "GM 한국 사업장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이야?". 후배는 "통상적으로 한국GM이라고 부르는데, 회사측에서 이젠 GM 한국사업장이라 불러달라고 합니다"고 답했습니다. 느낌이 묘했습니다. 문득 '아! 이제 GM이 한국GM에 대한 스탠스를 어느 정도 확정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최근 한국GM이 GM의 픽업트럭 브랜드 GMC의 '시에라'를 국내 론칭하는 것을 보면서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시에라는 미국에서 인기인 픽업트럭입니다. 사실 국내 시장에서 픽업트럭은 아직 큰 시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 소비자들의 픽업트럭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건 모델이 유럽에서는 인기가 높지만 국내에서는 외면받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국내 픽업트럭 시장 규모는 약 3만대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시장은 현재 쌍용차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GM이 선보였던 쉐보레 콜로라도 정도가 대항마 입니다. 실제로 작년 쌍용차 렉스턴 스포츠 판매량은 2만5388대로 전체 픽업트럭 시장의 85.5%를 차지했습니다. 쉐보레 콜로라도 판매량은 2929대입니다. 아직 쌍용차와의 격차가 큽니다.
한국GM이 대형 픽업트럭을 들여온 것은 쉐보레 콜로라도에서 어느 정도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시에라를 통해 픽업트럭 시장의 파이를 키우고 한국GM의 브랜드력을 일정 부분 높이기 위한 시도로 해석됩니다. 문제는 한국 시장에서 대형 픽업트럭이 통할지 여부입니다. 미국과는 다른 국내 환경에서 대형 픽업트럭이 어느 정도의 활용성을 가질 수 있을지에 의문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달라진 스탠스
한국GM은 시에라를 도입하면서 "판매량보다 국내 픽업 트럭 시장에서 새로운 기준점을 세우는 것을 우선순위로 뒀다"고 밝혔습니다. 문득 GM대우 시절 "소비자들의 다양한 경험을 위해"라며 여러 차량들을 선보였다가 실패한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판매량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는 하지만 막상 판매가 부진할 경우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종의 모험인 셈입니다.
다만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타깃을 명확히 했다는 점입니다. 한국GM은 시에라의 주력 타깃을 프리미엄 라이프를 즐기는 4050세대를 꼽았습니다. 업무용 차량이 아닌 세컨드카에도 1억원 정도를 지불할 수 있고 다양한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소비자가 대상이라는 겁니다. 슬로건도 '99%는 강한 물음표를 던질, 그러나 1%에게는 가져야만 하는, 모든 것을 이기는 단 하나'입니다.
GM대우 시절에는 넓은 범위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이번에는 특정 계층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 과거의 실패 경험을 통해 얻은 학습효과도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한국GM은 시에라의 초도 물량을 많이 잡지 않았습니다. 지난 7일 온라인 판매를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초도 물량 100여 대를 모두 판매했다고 밝혔습니다. 일단 마케팅에는 성공한 듯 보입니다.
한국GM의 시에라 출시 이면에는 다양한 노림수가 있습니다. 국내 시장에 GM 브랜드를 확장하고 픽업트럭 시장을 가져가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한국GM은 국내 세단 시장과 SUV 시장에서 현대차와 기아에 열세입니다. 그런 만큼 현대차와 기아가 아직 눈독을 들이지 않은 픽업트럭 시장을 통해 틈새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전략인 셈입니다.
또 다른 속내
한국GM은 수년간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최근 5년간 매년 수천억 원대의 영업손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차와 기아가 장악하고 있는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탓에 GM의 다양한 브랜드와 차량을 국내에 들여와 현대차와 기아에 식상해진 고객들을 잡겠다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실제로 한국GM은 올해 1분기 중 신형 CUV(크로스오버 유틸리티차량)인 '쉐보레 트랙스 크로스오버'를 출시합니다. 이어 GM의 고급 브랜드 캐딜락의 전기차 '리릭'도 수입, 판매할 계획입니다. 이는 GM의 스탠스가 명확해졌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GM은 한국 시장에서 쉐보레, GMC, 캐딜락으로 이어지는 브랜드 확장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을 확실히 한 겁니다.
더불어 그동안 유지했던 3공장 체제를 2공장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한국GM은 부평 1공장과 창원공장 두 곳의 가동률을 2분기 중에 100%로 끌어올려 연산 50만대 체제를 갖추겠다는 목표를 내놨습니다. 최근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전기차는 수입을 통해 국내 시장에 대응키로 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 직접 전기차 라인을 들여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은 GM의 한국GM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한국GM의 시에라 출시는 단순히 픽업트럭 시장만을 노린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에게 GMC 브랜드를 익숙하게 하고 이를 기반으로 향후 국내 시장에 GM의 다른 브랜드들을 선보이기 위한 사전 작업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국내 생산 라인을 소수의 차종에 집중키로 한 것도 효율을 높이고 글로벌 GM 라인업의 하나로 활용하겠다는 GM의 전략이 담겨있습니다. 시에라 출시로 본격화된 GM의 전략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무척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