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인더스토리는 매주 토요일, 한 주간 있었던 기업들의 주요 이슈를 깊고, 쉽고, 재미있게 파헤쳐 보는 코너입니다. 인더스트리(산업)에 스토리(이야기)를 입혀 해당 이슈 뒤에 감춰진 이야기들과 기업들의 속내를 살펴봅니다. [편집자]
또 집중포화 맞은 대한항공
대한항공이 또 이슈의 중심에 섰습니다. 과거 '땅콩 회항'과 오너 일가 사건으로 '공분(公憤)'을 샀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당시에는 누가 봐도 대한항공 오너 일가들의 탓이었지만 이번에는 살짝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사태에 불을 붙인 것이 정부라는 것도 예전과는 다릅니다. 이유야 어찌 됐건 대한항공은 이번에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대한항공으로서도 답답한 일일 겁니다.
최근 대한항공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일리지 이야기가 빠질 수 없겠죠. 대한항공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4년 전에 준비했다가 코로나로 시행이 미뤄지면서 이제서야 다시 시행하겠다는 것인데 왜 이렇게 들불처럼 일어나는지 당사자들의 입장이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다소 맥빠진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강한 어조로 부당함을 주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우리가 미흡했던 탓이 아니겠느냐. 사실 억울한 부분도 있고 더 깊게 설명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하지만 고객들이 그렇게 보셨다면 이유와 과정이 어떻든 받아들여야 한다"며 "향후 사태를 좀 더 면밀히 살피면서 이젠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회공시 답변과도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김이 샜습니다.
무언가 할 말은 있어 보였지만 최대한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습니다.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자칫 이슈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을 겁니다. 정부가 직접 나서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개편안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많은 부담을 느끼는 듯 보였습니다. 이유가 어찌 됐건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대한항공은 현재 거의 그로기 상태로 보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사실 대한항공이 마일리지 개편안을 준비했던 것은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한항공은 지난 2019년 12월 보너스 항공권과 좌석 승급 마일리지 공제 기준을 '지역'에서 '운항 거리'로 바꾸는 개편안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당시 코로나가 확산하고 하늘길이 막히면서 이 개편안의 시행은 잠정 연기됐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 확산세가 진정되고 하늘길이 다시 열리자 오는 4월부터 시행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기존 지역 기준 마일리지 공제는 국내선 1개와 동북아시아, 동남아, 서남아, 미주·유럽·대양주 등 국제선 4개 지역으로 나눠 차등 공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대한항공은 이를 앞으로는 운항 거리에 따라 국내선 1개와 국제선 10개로 세분화한다는 것이 이번 마일리지 개편안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거리 노선은 기존 보다 더 많은 마일리지가, 중단거리 노선은 더 적은 마일리지가 공제됩니다.
예를 들어 인천-뉴욕 편도 이코노미석 기준으로 살펴보면 개편 전에는 3만5000마일이 공제됐습니다. 하지만 개편안을 적용하면 이젠 4만5000마일이 공제됩니다. 1만 마일이 더 필요한 셈입니다. 하지만 단거리 노선은 다릅니다. 인천-후쿠오카 노선의 경우 기존 1만5000마일이 공제됐던 것이 개편안에 따르면 1만마일로 줄어듭니다. 단거리 노선 이용 시에는 고객들이 더 이득인 구조입니다.
대한항공이 이번 마일리지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내놓은 명분도 이것입니다. 대한항공은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구매하는 고객 중 국내선 이용 고객 비중이 50%에 가깝고 일본, 중국, 동남아 등 중단거리 고객까지 포함하면 76%"라며 "더 많은 고객들이 이번 개편안을 통해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해왔습니다. 장거리는 더 많이, 단거리는 더 적게 마일리지를 공제하겠다는 것이 이번 개편안의 핵심인 셈입니다.
"빛 좋은 개살구"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개편안이 발표되자 고객들은 반발했습니다. 쌓기는 힘들고 쌓아도 이용이 불편한 마일리지지만 그마저도 이번 개편안으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에 많은 고객들이 공분했습니다. 특히 대한항공이 혜택을 줄이려던 장거리 노선 이용 고객들의 불만은 컸습니다. 장거리 노선의 경우 제값 주고 항공권을 구매하는 사람보다는 쌓아둔 마일리지를 활용해 항공권을 구매하는 수요가 많다는 논리입니다.
이때만 해도 대한항공은 예상했던 반발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정도의 저항은 이미 개편안을 준비할 때부터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핵폭탄이 날아들었습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원 장관은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개편안에 대해 '빛 좋은 개살구', '눈물의 감사 프로모션을 하지는 못할망정 불만을 사는 방안을 내놓았다'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항공 주무부처의 장관이 대한항공을 콕 찍어 직격탄을 날렸으니 난리가 날법도 합니다. 게다가 시점도 묘합니다. 원 장관이 직격탄을 날린 시점은 마침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과 통신사들의 과점 폐해가 늘고 있다고 지적한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원 장관 발언 이후 여론은 대한항공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개편안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면서 대한항공은 여론의 뭇매를 맞습니다.
대한항공은 당황했습니다. 상황이 점점 악화하자 결국 대한항공은 백기를 들었습니다. 마일리지 개편안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겠다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업계에서는 대한항공이 원점에게 재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마일리지 개편안 시행을 철회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무 부처 장관의 한 방에 대한항공이 나가떨어진 셈입니다.
지금이 적기였는데
대한항공이 이번에 마일리지 개편안을 서둘러 시행하려 했던 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대한항공이 고객에게 제공하는 누적 마일리지는 재무제표상 '이연수익'으로 잡힙니다. 이연수익은 최초 매출 거래 시점의 마일리지 금액을 수익으로 환산하지 않고 마일리지를 사용했을 때 인식되는 수익입니다. 재무제표상에선 부채로 간주합니다. 대한항공의 작년 3분기 별도 기준 이연수익은 2조6824억원입니다.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2조7000억원에 달하는 부채를 조금이라도 빨리 털어내고 싶을 겁니다. 게다가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도 앞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시아나항공의 마일리지와 통합 작업도 해야 합니다.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이연수익도 더욱 늘어날 겁니다. 최근 코로나 확산세가 진정되고 하늘길이 다시 열리면서 항공업계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지금이 마일리지를 통해 부채를 털어 적기라고 판단한 겁니다.
대한항공은 작년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습니다. 별도 기준 매출액은 전년 대비 53.2% 증가한 13조4127억원, 영업이익은 96.9% 늘어난 2조8836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영업이익률도 21.5%를 나타내면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실적이 좋은 이 시기에 부채를 조금이라도 덜고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대비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던 셈입니다.
마일리지는 대한항공에게는 고객들이 쓰지 않으면 줄어들지 않는 이연수익입니다. 그런 만큼 고객들이 마일리지를 사용하도록 유도해 부채를 털어내려 했던 겁니다. 게다가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올해 실적도 작년처럼 좋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 만큼 올해 상반기 안에 결판을 보겠다고 나섰던 것인데 오히려 역풍을 맞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나
대한항공도 할 말은 있습니다. 이번 마일리지 개편안은 여타 외국 항공사에 비하면 후한 편입니다. 실제로 새로운 마일리지 개편안에서 8구간으로 분류된 인천-LA 노선의 경우 대한항공은 8만 마일을 공제합니다. 반면 델타항공(인천-시애틀)은 13만~15만마일, 유나이티드항공(인천-샌프란시스코)은 13만7000~16만마일, 에어프랑스(인천-파리)는 14만~30만마일이 공제됩니다. 대한항공이 고객들 입장에서는 이득입니다.
다만 대한항공이 마일리지 공제율을 높인 장거리 노선의 경우 대한항공의 '충성 고객'이 많습니다. 저비용 항공사(LCC)들은 취항하지 않거나 못하는 노선들이 대부분입니다. 반면 단거리 노선들은 이미 LCC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많습니다. 굳이 대한항공을 이용하지 않아도 대체재가 충분한 셈입니다. 대한항공은 이런 부분들을 놓쳤습니다.
여기에 대한항공의 대응 방식도 문제점으로 지적됩니다. 대한항공은 마일리지 개편안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대응보다는 "소비자에게 오히려 유리하다"는 점만 반복해 강조한 것이 고객들의 불만 수위를 높였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당장 내가 어렵게 쌓은, 쓰기도 힘든 마일리지가 순식간에 헐값이 된다는데 화가 나지 않을 고객은 없습니다. 그런 고객들, 특히 대한항공의 충성 고객들의 마음을 세세히 살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나서 기업을 옥죄는 모양새를 보인 것도 문제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사실 국토부가 항공 주무 부처이기는 하지만 장관이 직접 나서 기업의 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입니다. 업계에서는 최근 정부의 기업 길들이기로 보이는 행태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항공도 그 제물이 된 것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사실상 마일리지 개편안을 철회한 대한항공이 다음 카드로는 어떤 것을 꺼내들까요. 대한항공의 고민이 깊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