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며 국내 반도체 업계가 뒤숭숭하다. 미국이 지난 2022년 제정한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이하 반도체법)'에 따른 수혜 불확실성이 커진 탓이다.
트럼프 2기 체제가 중국에 대한 제재를 강화할 것이 확실시되는 만큼, 이와 관련된 셈법도 복잡해지고 있다. 중국 반도체 기업 규제에 따른 반사 이익도 기대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도 생산 거점을 두고 있어 대중 제재 강화는 국내 업체에 '양날의 검'이 될 전망이다.
'반도체법' 불확실성 커졌다
현재 업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따라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 정책에 변화가 있을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거 유세 당시 반도체 보조금 축소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인터뷰를 통해서도 반도체 지원법에 대해 "정말 나쁜 거래"라고 표현하며, 한국과 대만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정면 비판하기도 했다. 반도체법이 폐기되거나 수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시행된 반도체법은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이 핵심이다. 반도체 보조금 390억 달러(약 53조7000억원)와 연구개발 지원금 132억 달러(약 18조1800억원) 등 5년간 527억 달러(약 72조6000억원)를 제공하기로 돼 있었다.
이중 삼성전자는 64억 달러(약 9조원), SK하이닉스는 4억5000만 달러(약 6200억원)의 보조금과 각종 세제 혜택을 받기로 돼 있다. 양사는 현재 미국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현지 반도체 투자를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1년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 달러(약 23조6000억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는데, 보조금 발표 이후 이를 450억 달러(약 62조2000억원) 규모로 확충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4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38억7000만 달러(약 5조2000억원)를 투자해 AI(인공지능)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 기지를 건설한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의 첫 해외 HBM 생산 기지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고객사 확보가 늦어지며 테일러 공장의 완공 시점을 이미 한 차례 미룬 바 있다. 기존까지는 올해 말 가동 예정이었으나, 2026년에 생산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의 변화가 생겨 비용 부담이 지금보다 더해진다면, 공장 완공 시점은 더 지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첨단산업 지원책 축소와 자국 우선주의 강화로 인해 국내 첨단산업의 불확실성이 심화될 것"이라며 "고성능 AI전용 메모리칩, 선행 기술 개발 및 표준화 등에서 미국의 핵심 파트너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미국 반도체 패권을 위한 공화당의 대외정책은 동맹국 클러스터 중심이 아닌 자국 중심"이라며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 압박과 자국 투자 확대를 위해 반도체법상 가드레일 조항 및 보조금 수령을 위한 동맹국 투자 요건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이어 "특히 한국, 대만, 일본, 유럽 반도체 기업들에 대해서는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가 아닌, 투자를 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페널티를 부과하는 정책이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이와 달리 국내 기업에 대한 보조금 축소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법무법인 율촌은 보고서를 통해 "트럼프가 법 개정 또는 행정명령을 통해 반도체 관련 보조금과 세액공제 등 인센티브를 축소할 수 있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우려하나, 칩스법은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준비됐다"며 "중국 봉쇄의 목적이 첨단 공정 제조 기반 생태계를 미국 중심으로 구축하려는 전략의 일환인 점 등을 미뤄볼 때 (보조금 축소) 실현가능성은 낮다"고 짚었다.
中 추격 따돌릴 시간 벌까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강경한 중국 견제책은 국내 기업에는 양날의 검이다. 먼저 중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규제 강화에 따라 반도체 산업 내 중국 기업이 위축될 경우 국내 기업들은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는 중국이 레거시(범용) 반도체를 중심으로 생산능력을 높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랜드포스에 따르면 중국 제조업체의 D램 생산량은 2022년 전체 4% 수준에서 올해 11%까지 증가했다. 특히 중국 정부의 보조금을 통해 메모리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 D램 1위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추격이 무섭다.
내년 CXMT의 생산능력은 글로벌 3위 마이크론(20% 수준)에 이어 4위 수준까지 향상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 8일 잠정실적 발표에서 "중국 메모리 업체의 레거시 제품 공급 증가에 실적이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국 통제가 강화되면 국내 기업이 중국 기업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견제하는 동안, 국내 기업은 AI 메모리 등 첨단 제품에서 격차를 더욱 벌릴 수 있는 셈이다.
법무법인 율촌은 "트럼프의 강력한 중국 봉쇄 정책으로 반도체 및 반도체 전방산업 내 중국 기업의 위축은 국내 기업에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며 "트럼프는 △설계-미국 △장비-네덜란드 △생산-한국·대만 △소재·부품·장비-일본 분업 구조를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며, 중국 기업에 대한 지식 재산, 인력, 투자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대상 범위를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 역시 "트럼프의 미국 내 반도체 투자 확대 압박과 보조금 축소 가능성은 국내 기업에 위협 요인"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강력한 대중 수출·투자 통제로 중국의 첨단 반도체 성장이 지체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반사이익은 기회요인"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숨통 조이나
하지만 미국 정부의 중국 제재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기 집권 당시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제재를 가했는데, 2기에서는 이를 더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중국에 생산 거점을 둔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공장에 대한 압박이 거세질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 2022년부터 첨단 반도체 장비의 대중 수출을 제재하고 있는데, 일부 동맹국 기업에게는 '검증된 최종사용자(VEU)' 자격을 부여해 별도 허가 없이 첨단 반도체 장비를 중국 공장에 도입할 수 있게 했다. 지난해 바이든 행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내 공장도 VEU로 지정하며, 양사는 예외적으로 첨단 장비 반입을 허용받은 바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결정을 번복할 가능성이 커졌다. 대중 제재 강화 차원에서 동맹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VEU 지정을 취소할 수 있어서다.
현재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과 쑤저우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SK하이닉스는 우시 D램 공장을 비롯해 충칭 후공정 공장, 인텔로부터 인수한 다롄 낸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시안공장은 전체 낸드 생산의 28%, SK하이닉스의 우시·다롄 공장은 각각 전체 D램의 41%, 낸드의 31% 수준의 비중을 차지한다. VEU 지정 결정이 번복됐을 때 양사의 반도체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이유다.
게다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대중국 반도체 수출 비중도 높아 트럼프 2기의 정책이 부정적일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 본부장은 "한국은 반도체 총수출에서 중국(홍콩 포함) 비중이 약 50%에 달하고 있는 만큼, 한국에도 대중 교역제한에 대한 협조 요청이 있을 것"이라며 "중국에 주요 생산라인과 시장을 두고 있는 한국 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응 논리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