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후폭풍이 거셉니다. 반도체 업계도 외풍에 흔들리고 있는데요. 대만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은 최근 자서전 출간 행사에서 "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삼성의 경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언급했었죠.
기술 경쟁력이 정체된 삼성전자는 이번 계엄사태가 더 뼈아픕니다. 부동의 1위였던 메모리 시장에선 SK하이닉스에 밀렸고 '2030년 1위'를 공언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에선 TSMC와 격차가 오히려 더 벌어지고 있어서죠. 여기에 정치적 불안까지 더해진 것입니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의 독보적인 1위지만,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 리스크가 꼬리표처럼 따랐는데요. TSMC의 뒤를 쫓는 삼성전자는 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삼성전자 앞에도 느닷없는 정치 리스크가 놓이게 된 것이죠.
실제 유진투자증권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정치 리스크 확대는 곧 경제 리스크와 시장 리스크의 확대와 다름없다"며 삼성전자의 실적 전망과 목표 주가를 하향 조정하기도 했습니다.
韓·美 '대통령' 리스크
삼성전자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이뿐이 아닙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불러온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이하 반도체법)' 보조금 문제도 있죠.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 유세 때부터 반도체 보조금 축소를 시사해 왔는데요. 임기 막바지인 바이든 보조금 지급을 빠르게 확정 짓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까지 미국의 보조금은 자국 중심이었죠. 최근 미국 정부는 마이크론에 9조원 규모의 보조금 지급을 확정했습니다. 인텔과 TSMC, 글로벌파운드리스에 이어 보조금을 확정한 네 번째 기업이죠.
반면 삼성전자는 아직 보조금 확정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죠. 삼성전자는 64억 달러(약 9조1600억원), SK하이닉스는 4억5000만 달러(약 6400억원)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약속받았습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1년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 달러(약 23조6000억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는데, 보조금 발표 이후 450억 달러(약 62조2000억원) 규모로 확대했습니다. 파운드리 공장과 함께 첨단 패키징 시설, 연구개발(R&D) 단지로 판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보조금이 확정되지 않으면서 공장 완공 시점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앞서 삼성전자는 고객사 확보가 지연되며 올해 말 가동 예정이었던 테일러 공장의 완공 시점을 2026년으로 미루기도 했습니다. 만약 트럼프 정권이 보조금 지급에 제한을 둔다면 삼성전자는 이보다 시기를 더 늦추거나, 미국 투자를 축소하는 것까지 고려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율 못 잡고 고객 놓치고
수율(양품 비율)도 문제입니다. 삼성파운드리는 지난 2022년 차세대 공정인 GAA(게이트올어라운드) 공정을 3나노미터(㎚·10억분의 1m)에 적용했지만, 수율 확보가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수율 문제를 잡지 못하면서 고객을 놓치고 있습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3분기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9.3%에 그쳤습니다. 지난 2021년 4분기 18.3%에 달했던 점유율이 3년 만에 반토막났죠. 삼성파운드리의 점유율이 9%대로 떨어진 것은 지난해 1분기 이후 6개 분기만입니다.
반면 이 기간 TSMC 점유율은 64.9%까지 치솟았는데요. 작년까지 50%대의 점유율을 기록했던 TSMC는 올해 60%대의 점유율을 굳히고 있죠.
지난 2019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2030년까지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1위를 달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5년이 지났지만 1위와 격차는 더 벌어진 것이죠.
파운드리에 도전한 인텔마저 몰락하면서 TMSC 입지는 더 굳건해졌습니다. 이달 3일 인텔의 패트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파운드리 사업 부진의 책임을 지고 취임 3년만에 불명예 퇴진했는데요. 겔싱어는 파운드리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쏟으며 인텔의 부활을 꿈꿨지만, 꿈은 현실로 이뤄지지 않았죠.
삼성전자의 상황도 인텔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업계에서 삼성전자가 파운드리를 분사하거나 사업을 축소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주 돌죠. 이재용 회장이 "(파운드리 분사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으며 잠잠해졌지만, 경영 성과로 보여주지 못하면 소문은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포기는 없다…승부처는 '2나노'
내년에는 삼성전자와 TSMC의 2나노 공정 대결이 예상되는데요. 삼성전자는 TSMC보다 먼저 GAA 공정을 도입한 만큼,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2나노 공정에서 앞서가겠다는 계획입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장에 선임된 한진만 사장은 최근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 파운드리사업부 임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2나노 공정의 빠른 램프업'(ramp-up·생산능력 증가)을 우선 과제로 제시했죠. 세계 최초로 GAA 공정을 성공해놓고도 사업화의 기회를 잃고 다음 공정에서 또다시 승부를 거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로 해석됩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조직도 재정비했습니다. '미국통'인 한진만 사장이 파운드리 사업을 이끌며 미국 빅테크 고객사 확보에 주력하고 '기술통' 남석우 사장이 파운드리 사업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는 구조입니다. 이번에 CTO는 사장급으로 격상,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이영원 흥국증권 연구원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파운드리 분야의 부진과 레거시 공정에서 중국 반도체 기업의 성장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며 "경제 외적인 부담까지 가세할 경우 산업별 경쟁력에도 부정적 영향이 확대될 우려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짚었는데요. 삼성파운드리가 안팎의 거센 파도를 넘어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지켜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