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너지 산업이 다시 격변기로 접어들었다. 원자력 발전은 글로벌 탈탄소 기조 속 실질적 기저로 재부상하고 풍력·수소 등 재생에너지는 정권 교체와 맞물려 정책 우선순위에 올랐다. 두산은 원전 수출과 풍력 내수라는 양 날개를 앞세워 이 같은 산업 재편 흐름에 제대로 올라탄 모습이다. 체코 원전 수출을 계기로 K-원전 확장판을 노리는 동시에 새 정부의 에너지정책 수혜까지 기대되는 두산의 행보와 향후 전망을 짚어봤다.[편집자]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을 중심으로 뭉친 '팀코리아'가 체코 원전 수주에 성공하며 유럽에 첫 K-원전 깃발을 꽂았다. 수주의 계약 주체는 한수원이지만 시장의 시선은 핵심 주기기를 맡은 두산에너빌리티로 향한다. 이번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대규모 수익이 기대되는 기업이어서다. 멈춰 있던 국내 원전 생태계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특히 체코 두코바니 지역에 이어 추가로 신규 원전 건설이 검토되는 데다 북미 지역의 원전 수출 가능성도 점쳐지면서 K-원전 '확장판'을 이끈 주인공으로서 기대를 높이고 있다.
정부가 설계한 판, 두산이 움직인 말

10일 업계에 따르면 체코 정부와 한수원은 지난 4일(현지시각) 전자서명을 통해 두코바니 원전 5·6호기 건설 본계약을 체결했다.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이후 16년 만에 이뤄진 해외 원전 수주이자 유럽 시장 첫 진출 사례다. 체코 내에서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프라 프로젝트로, 총 사업비는 약 4000억 코루나(한화 약 26조원)에 달한다. 이번 계약은 향후 테믈린 부지에 계획된 추가 2기 건설 사업 수주전에도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사업은 한수원을 주계약자로 한 팀코리아가 맡는다. 팀코리아에는 한전기술·한전KPS·한전원자력연료 등 한국전력 계열사 외에도 두산에너빌리티, 대우건설 등 민간 기업이 포함됐다.
주기기 제작은 국내 유일 원전 주기기 제작사인 두산에너빌리티가 수행한다. 두산은 원자로, 증기발생기, 냉각펌프 등 1차 계통 핵심 설비를 책임지며 체코 자회사 두산스코다파워를 통해 증기터빈 등 2차 계통 장비도 공급할 예정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두코바니 원전 2기 계약에서 두산의 수주액이 8조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한전기술(1조8000억원), 한전KPS(8900억원) 등과 비교해 규모가 압도적이다.

두산은 수주 과정에서 그룹 차원의 외교와 현지 네트워크를 총동원했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지난해 5월 체코 프라하에서 '두산 파트너십 데이'를 열고 체코 정부·금융기관·현지 기업을 초청해 팀코리아의 수주 당위성을 밝혔다.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체코 방문에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해 정상외교 라인에서도 체코 정부와의 협력 기반을 쌓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현지 기업들과의 공동 생산 양해각서(MOU)도 선제적으로 체결했다. 두산은 향후 두산스코다파워를 거점으로 수소·가스터빈 등 무탄소 발전 기술을 이전해 체코를 유럽 내 무탄소 발전 허브로 키우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수주 성과가 원전 생태계 전반에 온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두산에너빌리티와 주기기 생산을 함께하는 국내 협력사는 400여 곳에 달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 원자력 공급 산업체는 총 995개다. 이 가운데 91.9%는 원전 건설·운영에서 매출을 낸다. 전체 종사 인원은 3만5649명에 이른다. 이번 체코 프로젝트가 생태계 복원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기대감을 반영하듯 체코 수주 성사 이후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연초 1만8000원대에서 이달 초 4만5000원을 넘어서며 2.5배 가까이 급등했다.
체코 찍고 미국으로…K원전 확장판 기대감

이번 수주는 단순히 두산에너빌리티 한 기업만의 실적 회복을 넘어 국산 원전 생태계의 해외 수출 파이프라인이 16년 만에 복원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두산이 맡은 주기기 분야는 국내 원전 기술력의 집약체로, 이번 성과는 기술 보유국으로서의 입지를 재확인시켰다는 점에서도 상징적이다.
향후 수출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이번 계약은 체코 두코바니 지역 2기에 한정되지만 체코 정부는 향후 테믈린 지역에 추가로 2기의 신규 원전을 건설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지난 정상회담 당시 체코 측은 "첫 번째 계약이 성공적으로 이행될 경우 동일한 파트너와 협력을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며 팀코리아에 대한 기대를 드러낸 바 있다.
미국에서도 원전 수요가 재부상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후 원전 용량을 400GW까지 확대하고 2030년까지 신규 대형 원전 10기를 착공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두산은 웨스팅하우스와의 증기발생기 공급 협력, 뉴스케일과의 소형모듈원자로(SMR)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미국 시장에서의 입지를 키워가고 있다. 유럽 첫 수주가 선진국 추가 진출의 교두보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문경원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2030년까지 대형 원전 10기를 착공하겠다는 미국의 계획은 상당히 대담한 목표"라며 "만약 실현된다면 국내 원전 밸류체인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웨스팅하우스가 미국 내 원전을 새로 건설하려면 한국의 기자재 공급망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라며 "향후 미국 원전산업의 중심축이 SMR로 이동하더라도 국내 공급망의 수혜 범위는 오히려 더 넓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