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된 수주인 줄 알았던 체코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가 막판에 '법정 변수'라는 복병을 만났습니다. 프랑스 EDF가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지난 7일로 예정됐던 계약 서명식은 전날(6일) 밤 급히 취소됐는데요. 체코 정부 차원에서 계약을 사전 승인하며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의 협상을 밀어붙이고는 있지만 소송에 막혀 발이 묶인 형국입니다.
체코·프랑스·한국 3국의 산업·정치 셈법이 뒤얽힌 이례적인 수주전,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법원으로 달려간 프랑스, 왜?
체코 두코바니 원전 본계약식 하루 전인 지난 6일 저녁 체코 법원이 프랑스 EDF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이 가처분은 EDF가 본안인 행정소송과 함께 제기한 것으로, 법원은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약 체결을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요. 계약이 체결된 뒤에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계약 서명을 하러 체코에 도착한 한국 대표단에게도 날벼락이었는데요.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국회의원 등 대규모 대표단이 행사에 참석하려고 출국했으나 계약식 무산으로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귀국 직후 "체코 정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며 이번 사태가 양측 모두에게 뜻밖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체코 정부는 8일 내각 회의를 열고 한수원과의 신규 원전 계약을 '사전 승인'했습니다. 발주처인 체코전력공사(CEZ)는 "우리는 한수원과만 협상 중이며 EDF와는 계약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요. 법원의 계약 정지 결정에도 불구하고 체코 측의 협상 기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EDF는 지난해에도 한수원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을 때 체코 경쟁 당국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는 기각됐습니다. 이번에 다시 제기한 행정소송에서는 입찰 절차의 공정성과 한수원이 제시한 가격의 현실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전 세계에서 EDF가 하는 사업들은 공기(공사기간)가 과도하게 지연되고 비용이 몇 배 인상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며 "(EDF의 주장은)팀 코리아의 경쟁력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체코 정부는 계약 서명 대신 사전 승인이라는 중간 단계를 선택했는데요. 이는 단순한 법적 대응이 아니라 계약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이번 사업은 한국수력원자력이 주관하고 두산에너빌리티 등 주요 원전 기업들이 함께 참여하는 '팀코리아' 형태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원전 산업의 첫 유럽 수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만큼 업계 안팎의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사업입니다. 유럽은 까다로운 안전·환경 기준으로 원전 기술의 시험대이자 향후 글로벌 수출 확장의 교두보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업계에서는 계약 서명이 일시 보류된 상황이지만 체코 정부가 한수원과의 협상을 접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발주처의 확고한 계약 의지 때문인데요. 베네시 CEZ 사장은 "가격과 공기 모두 한국이 가장 우수했다"는 입장을 내놨고 체코 총리 역시 "한국과 가능한 한 빨리 사업을 현실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계약이 끝나고도 끝나지 않은 이유

프랑스 EDF가 돌연 법적 대응에 나선 이유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가격이나 절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산업적 이해관계, 기업의 생존 위기, 그리고 국가 전략까지 복합된 행동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무엇보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유럽 내에서 자국 원전 기업이 핵심 발주국인 체코에서 패배한 것이 상징적이었습니다. EDF는 사실상 프랑스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통제하는 전략산업 기업으로, 그동안 유럽 원전 시장에서 '기본 옵션'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같은 유럽연합(EU) 회원국인 체코가 EDF 대신 한국을 택한 건 프랑스로서는 체면 손상이자 시장 지위 상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일이죠.
이런 이유로 체코 수주 결과가 단순히 한 건의 계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예정된 폴란드·루마니아·네덜란드 등 유럽 내 대형 원전 프로젝트의 판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위기감도 커졌습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번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흔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깔려 있었던 셈입니다.
EDF 자체의 사정도 녹록지 않습니다. 수년째 이어진 재정 악화와 경영 불신 속에서, 체코 수주는 실적 반등과 대외 신뢰 회복의 돌파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죠. EU 탄소중립 기조 속에서 노후 원전 해체 부담은 늘고 있고 신규 사업에서도 줄줄이 예산 초과와 공기 지연을 겪으면서 100조원이 넘는 부채를 떠안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체코 원전 수주는 반드시 따내야 할 명분 있는 성공이고 패배한 뒤에도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결국 존재 증명에 가까웠던 셈입니다.
여기에 프랑스 정부의 의지도 얽혀 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최근 원자력 산업을 다시 외교 무대로 끌어올리는 전략을 추진 중입니다. EDF는 단순한 민간기업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대외 전략의 일환으로 활용해온 도구이기도 합니다. 체코 수주전 패배는 EDF의 문제가 아니라 곧 프랑스 외교의 실패로 비칠 수 있는 셈입니다. 한국이 이긴 게 아니라 프랑스가 뺏겼다는 시선이 나올 수 있는 구도에서 이긴 쪽보다 잃은 쪽이 더 절박하게 움직이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일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8일(현지시간) 체코 원전 수주 계약 연기와 관련해 "일정에 조금 지연이 있고 이로 인한 손해가 있을 수 있지만 잘 해결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앞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역시 계약 무산이 아닌 지연되는 부분으로 단순히 시간 낭비에 그치지 않고 한국 원자력 산업계의 신뢰를 쌓는 계기로 만들겠다고 밝혔는데요. 이들의 확신대로 프랑스의 몽니를 잘 해결하고 유럽 원전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이 확실히 각인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