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경쟁이 불가능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말한다.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가 원인이다. 서비스 영역의 한계가 없는 IT 업계에선 글로벌 기업이 자유롭게 국내서 사업하는데, 법과 제도가 미흡하면 국내기업 피해가 클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국내외 기업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 중요하다. 비즈니스워치는 창간 7주년을 맞아, IT 산업에서 벌어진 불공정 경쟁을 살펴봤다. [편집자]
국내 IT업계에서는 통신사(ISP, 네트워크 사업자)와 구글·넷플릭스 등 글로벌 콘텐츠사업자(CP) 간 망 사용료 분쟁이 오랜 기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일명 '넷플릭스 무임승차 방지법'이 포함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글로벌 CP에 국내 망 품질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지만, 국내 CP와의 역차별 문제 해소까지는 갈 길이 먼 상황이다.
끝없는 망 사용료 분쟁
망 사용료란 넷플릭스, 구글, 네이버 등 콘텐츠 제공업체(CP)가 통신사(ISP, 네트워크 사업자)가 깔아놓은 망을 쓰는 대가로 내는 비용을 말한다. 망 사용료를 둘러싼 분쟁은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형태나 망 접속 방식 등이 다양한 IT 인터넷 서비스 특성상 기준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약점을 이용해 넷플릭스 등 글로벌 CP들은 한국에서 압도적인 트래픽을 사용하면서도 망 사용료는 내지 않고 있다. 네이버, 카카오 등 국내 CP사들이 매년 통신사에 수백억원대의 망 사용료를 내는 것과는 상반된다.
앱 분석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국내 넷플릭스 결제금액은 지난 2018년 3월 기준 34억원에서 올해 3월 362억원으로 2년 만에 10배 이상 늘었다. 이에 따라 트래픽 발생량도 지난해 말 대비 올 1분기 2.3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CP사들로부터 불평등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넷플릭스도 망 품질 의무 진다
최근 관련 개정안이 국회의 문턱을 넘으면서 분쟁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다. 지난 20일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개정법률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개정안에는 이용자수, 트래픽 등이 '대통령령(시행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부가통신사업자는 '서비스 안정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국내에 주소나 영업소가 없는 해외사업자라도 국내 대리인 지정을 통해 법 적용을 받도록 했다.
기존 전기통신사업법에도 '전기통신사업자가 전기통신역무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으나, 이는 ISP에만 해당됐을 뿐 CP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번 개정안을 통해 CP도 부가통신사업자로 적용돼 의무가 강화된 셈이다.
특히 법 적용 기준이 이용자수, 트래픽 등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많은 이용자수를 기반으로 막대한 트래픽을 유발하는 글로벌 CP 등이 개정안의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의무는 글로벌 공룡 대신 국내 공룡이?
다만 IT업계에서는 개정안 통과에 대해 분분한 의견을 내놨다. CP와 의무를 나눌 수 있게 된 ISP는 개정안 통과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네이버와 카카오 등 국내 CP 업체가 속한 한국인터넷기업협회를 비롯해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벤처기업협회 등 3단체는 공동 입장문을 내고 유감을 표명했다.
이들은 "서비스 안정성 확보라는 모호한 용어가 첨예하게 대립 중인 관련 시장과 망 중립성 원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이후 전개될 논란이 걱정된다"고 제언했다. 해당 개정안이 글로벌 CP를 견제하기 위한 법안일지라도 이로 인한 실질적인 짐은 국내 CP가 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다.
이같은 우려가 나오는 이유는 '서비스 안정성'이라는 용어에서 비롯된다. 당초 국회는 '서비스 품질 유지 의무'라는 용어를 제시했지만, 최종 개선안에는 '서비스 안정성'이라는 말로 대체됐다. 큰 틀에서 보면 의미하는 바는 유사하지만 범위는 다소 축소된 것이다.
일각에서 넷플릭스 등 글로벌 CP가 이같은 규제의 헛점을 이용해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걱정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안정성은 서비스 품질처럼 정확한 척도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트래픽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근거만으로도 의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의 경우 자사 정책인 '오픈커넥트'를 내세워 안정성 확보 의무를 충족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오픈커넥트란 망 사용료를 내는 대신 통신사에 캐시서버를 무상으로 설치하는 정책이다. 넷플릭스는 이를 통해 트래픽 사용량을 95%까지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통신업계에서는 오픈커넥트 방식이 국내 서버에서 트래픽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없다고 반박한다.
만약 넷플릭스가 오픈커넥트를 서비스 안정성 대안으로 내세우게 되면 통신사는 실질적으로 글로벌 CP에 망 사용료를 청구하기 어려워져 개정안은 실효성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이번 개정안은 글로벌 CP를 제재할 수 있는 법안 제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세부 기준 확보 전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상황"이라며 "글로벌 사업자 규제를 통해 국내 사업자와의 불평등 해소가 현실화될 수 있는 시행령을 구체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