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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바이오 업계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며 편견을 깨는 여성 리더들이 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후배 세대가 목표로 삼는 지향점이자 동기가 된다. 이를 통해 이룬 과학기술 발전은 국가경쟁력과 직결된다. 비즈워치는 제약바이오 연구개발, 영업 등의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 리더를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여성 과학인을 지원하는 것은 과학기술계 인재 확보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과학기술회관에서 만난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 이사장(덕성여대 약학대학 교수)에게 '왜 여성 과학인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이 같은 답변이 나왔다. 여성 과학인을 지원하는 일 자체가 국가 중대사라는 간단하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다. 즉 여성 과학인의 경력 단절을 막아 이공계 인재난을 해소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과거보다 대학교육을 받고 과학계에서 성과를 내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어 자칫 과학기술계에서 성평등이 이미 이뤄졌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숫자는 가야할 길이 먼 현실을 가리킨다.
2023년 기준 자연과학계열의 여성 대학(원)생 비율은 53.5%로 남성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공학계열 학생 수는 23.6%로 여전히 낮다. 회사나 연구원에서 한창 실력을 발휘해야 할 시기에 자연공학계열 기혼 여성전공자 5명 중 1명(18.2%)은 출산,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다.
문 이사장이 이끄는 WISET은 경력단절 여성과학인의 복귀를 비롯해 여학생 진로멘토링, 긴급돌범 바우처 지원 등 다양한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WISET은 2013년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설립된 곳이다.
문 이사장은 "WISET을 비롯한 여러 기관의 노력으로 자연공학계에 유입되는 여학생 수가 늘고 있지만 이들이 실무에서 경력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큰 문제"라며 "WISET은 경력복귀 사업뿐만 아니라 진로탐색 멘토링 등 다양한 여성과학인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과학인 지원에 힘쓰는 이유
문 이사장은 출산과 육아를 하며 연구경력을 이어온 여성과학인이다. 유방암 전이 연구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내며 이 분야에서 권위자로 불린다. 하지면 이 자리까지 오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미국 박사과정 중 자녀를 낳고 육아와 실험실 생활을 병행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수차례 이겨내며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한국에 돌아온 그가 넘어야 할 벽은 더 높았다. 그 당시만 해도 여성과학자에 대한 편견이 컸다. 대학교 교직을 얻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어렵게 잡은 자리인 만큼 여성과학인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 더 치열하게 노력했다고 한다. 이 경험이 여성과학인을 지원하는 길로 그를 이끌었다.
문 이사장은 "어렵게 경력을 이어가면서 제 몫을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 후배 과학자들의 길이 트이겠다고 생각했다"며 "저뿐만 아니라 지금 젊은 여성과학자들도 '여자를 뽑았는데 못 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더 치열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재단에서 여성과학인을 지원하는 것이 능력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은 오해"라며 "오히려 남성과 여성 과학인을 똑같은 과학인으로, 그들의 능력을 그대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포기하지 말아 달라"
WISET이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여성과학인의 경력단절 예방과 업무복귀 지원이다. 이를 위해 WISET은 출산, 육아 휴직으로 인한 연구과제 중단을 막기 위해 과제비를 지원하는 '육아기 연구자 펀드', 육아기 자녀를 둔 여성과학인을 위한 '긴급돌봄 서비스 바우처(교환권) 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밖에 WISET은 이공계 진로탐색 교육, 경력성장 멘토링 등 여성과학인의 생애주기에 걸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재단의 활동이 더 많은 사회적 공감대를 받을 수 있도록 남성 과학인들과 함께 하는 '와이즈맨' 캠페인도 추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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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에는 한국이 유럽의 연구혁신 프로젝트인 '호라이즌 유럽'의 준회원국이 되면서 관련 성평등 계획 가이드라인을 개발해 대학과 연구기관에 제공할 계획이다.
호라이즌 유럽은 EU(유럽연합)가 2021년부터 2027년까지 955억유로(약 140조원)을 지원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연구혁신 프로그램이다. 국내 연구진이 호라이즌 유럽의 연구에 참여하려면 '과제책임자 성별 현황', '육아휴직자 성별 복귀율' 등의 성평등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문 이사장은 "대한민국은 올해부터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으로 참여하며 연구팀은 성평등 계획 제출이 필수"라며 "국제적 기준에 맞춰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활용 정책 지원 확대가 더욱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문 이사장에게 후배 여성 과학인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는지 물었다. 문 이사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거듭 말했다.
문 이사장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똑같지만 여성과학인은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을 더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하나 더 얹어진다"며 "젊은 세대부터는 능력만큼 대우받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는 운이 좋아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중간에 일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포기하는 동료들을 자주 지켜봤다"며 "너무나 일을 하고 싶은데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쉽게 포기하지 말고 선배 과학자들을 만나거나, 여러 방법을 찾아봐달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