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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신약개발 등 의료 혁신연구를 수행하는 대학 및 연구기관 지원금을 삭감하며 바이오 분야에서 인재 유출을 부추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0여년 전부터 해외 인재를 공격적으로 유입한 중국이 이 기회를 잡으며 한국과 기술 격차를 벌릴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우리나라는 최근 해외 인재를 유입하기 위해 '톱티어 비자' 도입 등 제도개선에 나섰다. 하지만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 비교하면 이제 막 발을 뗀 수준이다. 인재 영입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비자뿐만 아니라 정주여건 개선, 연구자 네트워트 구축 등 다각화된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학계는 초특가 세일 중"
19일 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후 미국 과학계가 들썩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대학과 연구기관에 지원하는 연구 간접비용을 삭감하기로 하면서다. 과학계에서는 의료 혁신 연구가 중단되거나 지연되면서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이 퇴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연구비는 크게 인건비, 실험 재료비 등에 쓰이는 직접 비용과 행정 인력 고용, 연구실 유지관리 등을 위한 간접 비용으로 나뉜다. 트럼프 행정부는 NIH 지원 간접비를 전체 연구지원금의 15% 이하로 제한했다. 이를 통해 연간 40억달러(5조7000억원) 규모의 비용을 절감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전까지 전체 연구지원금에서 간접비 비중이 컸던 기관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세계 최초로 CAR-T(키메릭 항원수용체 T세포) 치료제를 개발한 것으로 잘 알려진 펜실베이나대학은 이번 조치로 NIH 지원금이 2억4000만달러(3400억원) 삭감됐다.
다행히 메사추세츠, 일리노이 등 22개 주정부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인용되면서 지원금 삭감 효력은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하지만 향후 재판결과에 따라 재개될 가능성도 있어 안심하긴 이르다.
미국의 과격한 보건의료 분야 R&D(연구개발) 비용 삭감을 반갑게 바라보는 곳도 있다. 중국 등 미국 인재를 유입하기 위해 눈독 들이고 있는 국가들이다.
중국은 공산당 주도로 2009년 '천인계획'이라는 인재유입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파격적인 지원을 통해 10년간 1000명의 고급 해외인재를 확보하는 내용이다. 기술유출 등에 대한 국제사회 비난에 중단되는 듯했으나 지금도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
지난 2020년 미국에선 저명한 나노연구자인 찰스 리버 하버드 생물화학과 교수가 천인계획에 포섭되며 논란이 된 적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가 천인계획에 참여했다가 기술유출 혐의로 지난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NIH의 연구비 삭감 조치 이후 칼 버그스트롬 워싱턴대학교 진화생물학 교수는 현재 미국 학계가 "초특가 세일 중"이라고 한 외신에 밝혔다. 연구가 중단되게 생긴 연구자들이 비용을 지원해주는 다른 국가나 기관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한국도 해외 석학 모셔오기
중국의 바이오 인재유입은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중국 바이오 산업이 무척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어서다. 지난해 한국이 유한양행의 비소세포페암 치료제 '렉라자'의 미 식품의약국(FDA) 허가성과에 도취될 때 중국은 이미 5년 전 FDA로부터 항암제('브루킨사') 허가를 받았다.
연초 이후 로슈, 머크 등 글로벌 빅파마들이 중국계 기업의 신약후보물질을 잇따라 도입하는 등 글로벌 기술거래의 중심지도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중국 혁신신약의 기술거래 건수는 총 42건으로 전체 거래금액은 전년동기대비 80% 증가했다.
이러한 급격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바이오 산업 지원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이 여기에 해외 바이오 인재까지 품어버리면 한국과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
우리나라도 움직이고 있다. 고급인재 유입을 위해 법무부는 올해 톱티어 비자를 신설할 계획이다. 우수 외국인 인재와 동반가족에 출입국과 체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외국 과학기술 인재가 영주와 국적을 빠르게 취득할 수 있는 패스트트랙 제도도 2023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고급 인재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선 출입국 편의뿐만 아니라 연구자 네트워크 마련, 정주여건 개선 등 다각화된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손지호 한국바이오협회 산업지원본부장(상무)는 "실력이 있는 해외 인재들이 연봉, 처우 외에도 자녀의 교육이나 목돈이 필요한 집값 등의 문제로 국내 체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러한 정주여건 개선과 함께 규모가 작은 바이오기업들이 해외인재를 찾고 유치할 수 있는 네트워크 구축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는 방안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