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스턴처럼 바이오 클러스터를 키우겠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취임 1년만인 2023년 4월 세계 최대 바이오산업단지가 있는 미국 보스턴을 방문한 뒤 각종 규제완화와 지원책을 통한 '한국형 보스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다음해 3월에는 "바이오산업을 반도체 신화를 이어갈 차세대 주력산업으로 육성하겠다"며 "국내 바이오산업의 생산 규모가 2035년까지 200조원 시대를 열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겠다"고 약속했다.
윤석열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이오산업의 육성 의지를 천명해왔다. 하지만 의정갈등과 글로벌경기침체에 쌓인채 업계가 체감할 수 있는 혁신적 변화나 지원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대규모 연구개발(R&D) 삭감 등의 정책은 가뜩이나 어려운 기업들과 연구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말뿐인 공약들…R&D 대규모 삭감 '후폭풍'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선 당시 △국무총리 직속 '제약바이오혁신위원회' 설치 △R&D 지원 2배 확대 △항암제 및 희귀질환 신약에 신속등재제도 도입 △코로나 백신접종 부작용 피해회복 국가책임제 △대상포진 예방백신 무료 접종 △재난 의료비 지원 확대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취임 후에는 한국형 바이오클러스터 조성, 대통령 직속 국가바이오위원회 설치 등을 약속했다.
이들 정책 중 시행된 것은 제약바이오산업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제약바이오혁신위원회 설치 등에 불과하다. 제약바이오혁신위원회는 정부 출범후 1년 6개월이 지난 2023년 12월에야 첫 회의를 열었는데 현재까지 활동이 미미하다는 평가다. 더구나 또다른 제약바이오산업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겠다는 대통령 직속 국가바이오위원회가 탄핵 정국인 지난 1월 출범해 중복 논란에 휩쌓여 있다.
오히려 2024년 핵심 공약을 역행하는 대규모 R&D 예산 삭감을 주도해 과학기술계와 산업계의 비판을 받았다. 정부는 당시 예산안을 통해 국가연구개발(R&D)을 16% 넘게 줄인 25조9000억원으로 책정했다 야당 등의 반발로 14.7% 줄인 26조5000억원을 확정했다.
이로 인해 학계에서는 연구원들이 연구비 부족으로 실직하고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산업계에서는 R&D 과제비 일괄 삭감으로 인한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정부는 뒤늦게 2025년 R&D 예산을 29조6000억원으로 늘렸지만 신규 및 특정 과제 위주로 배정되면서 후폭풍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이오클러스터 외쳤지만…무너진 바이오생태계
윤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이오클러스터를 주창했지만 정작 국내 바이오생태계는 선순환 고리가 끊어진채 고사직전으로 내몰렸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한 창업, 이를 지원하는 적극적인 투자, 도전과 투자의 결과물이자 성장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기업공개 모두 부진했다.
통계로 확인가능한 2022년 기준 바이오벤처기업 창업 기업은 29곳으로 3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도전의식을 가진 연구자들이 창업을 꺼리고 있다. 국내 코스닥 기술특례상장 기업 중 신약개발 기업 수도 2023년 4곳, 2024년 5곳으로 그쳤다. 투자할 곳도 없고 엑싯도 어려운 상황에서 바이오투자 기피현상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2015~2020년 바이오붐 당시 창업했던 많은 바이오텍이 무너지고 연구원들이 실직하는 사태가 이어지며 "국내 바이오벤처의 도전, 혁신신약 개발은 무모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지만 "2027년까지 연 매출 1조 원 이상인 블록버스터 신약 2개를 개발하겠다"는 정부의 역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바이오생태계 복원 등 바이오산업 새판짜기 불가피
새 정부가 들어선다면 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한 종합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해보인다. 바이오생태계 복원, 투자 활성화, 연구개발 지원, 기업공개 등 산업의 전 영역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제약바이오혁신위원회나 국가바이오위원회 등의 컨트롤타워 역할은 어떤 방식으로든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바이오산업 관련 자본시장 개편에 대한 공감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 측 인사는 "현재 바이오기업의 상장도 폐지도 쉽게 하되 그 기준이 법차손, 매출이 되어서는 안된다는데 컨센서스가 있다"고 전했다.
정부 관료 출신 업계 관계자는 "윤 정부는 바이오 생태계와 이를 구성하는 자본시장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무지했다. 바이오산업 육성을 외쳤지만 결과적으로는 바이오산업 붕괴를 방치했다"면서 "다음 정부가 바이오산업 육성의지가 있다면 대대적인 새판짜기가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