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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콘을 기다리며

  • 2014.05.20(화) 09:53

"유단잔가? 어디 천천히 들어와봐" 코미디 프로그램 `깐죽거리 잔혹사`코너에 나오는 대사다. 대사의 주인공은 이 코너 하나로 일약 이동통신사 모델이 됐다. 통신사 CF 모델이 나올 정도라면 당대에 가장 잘 나가는, 가장 많이 보는 프로인 셈이다.`세월호` 참사로 몇 주째 방송되지 않는 코미디 프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냥 지나쳤던 말의 의미에 대해  느낌이 새롭기 때문이다. 아니, 이 사고가 우리에게 던지는 충격이 하도 커서, 주변에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도 `세월호`와  연결 짓는, 조건반사식 연상작용인 듯싶다.

`천천히`는 속도전의 상대어다. 대한민국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에 착수했지만 불과 반세기 만에 선진국 문턱까지 쫓아왔다. 폐허에서 출발해 세계 경제 10위권대에 올라서고 그와 동시에 `민주화`라는 사회 발전도 동시에 이룩했다.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성과는 속도전이 이끌었다. 속도전의 중요성에 대해 한 사업가의 이야기다. "공사기간이 단축되는 동안의 임금이 절약되는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 효과는 결코 간단치 않다."

대개 남의 돈을 써서 공장을 짓게 되는데, 공기 단축으로 우선 원금을 상환할 시간을 벌게 된다. 상환이 시작되기 이전인 `거치 기간`에 하루라도 빨리 공장을 지어 생산에 들어가게 되면 공사 건설 비용을 줄일 뿐 아니라 자금을 회수할 기간도 앞당기게 된다. 여기서 생긴 금전적 여유는 기술 개발에 투자해 생산단가를 낮추고 이는 가격경쟁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같은 조건하에서 가격 경쟁력은 회사가 도태되고 살아남는 운명을 가르는 요소가 된다.

속도의 템포가 한번 빨라지고 나면 가속도가 붙는다. 경쟁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상승작용을 통해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이러한 탄력으로 한국 경제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덕분에 정보기술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여러 분야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은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단순히 따라가거나, 베낄 수 있는 상대는 점점 사라지고 오히려 글로벌 플레이어들로 부터 견제를 받거나 주변의 후발 경쟁자들로부터 쫓기는 입장이 된 것이다.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유능한 스프린터라면 옆을 보면서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시간 낭비`다. 뒤를 본다는 것은 상상하기 조차 힘든 사치다. 하지만 옆을 보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현 지표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방향을 잡지 못하면 같은 실수가 반복되기 마련이다. 서해페리호 침몰 사건(1993년)이 터진 지 20년 지나 또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세상 물정 몰랐던 조선시대에도 실수를 되풀이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1598년) 30년 만에 정묘호란(1627년)을 맞았다.    

빠른 속도로 간다고, 먼저 도달할지는 의문이다. 만약 세계 경제가 예수 탄생 이후 해마다 1%씩 성장했다면 세계 인구 1인당 국민소득은 7475달러가 아니라 2000억 달러에 달한다는 추정이 있다(권홍우 지음 `부의 역사`에서). 문제는 제대로 된 방향성이다. 하루 1킬로미터씩을 가더래도 명확히 방향이 정해져 있다면, 오락가락 하루에 10킬로미터를 움직이는 것보다 길게 볼 때는 훨씬 낫다. 제대로 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허둥대고 있다. 사고 발생 초기 구조에 실패한 해경이나 조기 대응을 못한 정부, 오보를 내고 과잉 보도를 했던 언론 등. 차분히 사태를 수습하기보다는 갈팡질팡하면서 오히려 일을 키웠다. `당황하지 않아야 할` 오피니언 리더들이 자중지란에 얽히고 있다. 최근에는 청와대의 KBS 보도 개입 논쟁이 벌어지며 불똥은 엉뚱하게도 `언론 보도의 중립성`으로 옮겨붙고 있다.

대통령이 눈물을 보이며 사고 대응책을 내놓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과연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 의문이다. 더구나 6·4 지방선거라는 정치적 변수까지 가세하여, 사회 분위기는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 쉽지 않다. 불안한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는, 세월호 사건이 진영논리를 앞세운 정치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선거 국면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나면, 바로 전 세계를 들끓게 하는 월드컵 축구 시즌이다.

그때쯤이면 코미디 프로그램도 아마 다시 방영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속도`를 낼 것이다. 다시 뛸 것이다. 새로운 사고가 터져서 또 반성하게 될 때까지….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좀 못 보아도 괜찮다. 그 대신 `속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면 되니까. 그걸 찾는 게 세월호 희생자들이나 유족에 대한 예의다. 이번만은 목적이나 위치, 방향과 속도도 감안하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어가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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