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김용민 기자/kym5380@ |
한국인에게 김치는 약이었다. 시골에서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배앓이를 하면 할머니가 장독대에서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나 배추김치 국물을 떠먹이며 아픈 배를 달래주었는데 김칫국물에 진짜 약효가 있는 것인지 혹은 할머니의 정성 덕분인지 배앓이가 씻은 듯이 나았던 기억이 있다.
1970-80년대 난방으로 연탄을 많이 때던 시절에도 김치는 약이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지체 없이 동치미 국물이나 배추김치 국물을 마시면 중독에서 깨어날 수 있다며 응급처방으로 김치 국물을 장려했던 시절도 있었다. 사실 12년 전, 중국에 중증 호흡기 증후군 사스가 만연했을 때도 중국인들은 한국인이 김치를 먹기에 감염이 잘 되지 않는다며 일부러 김치를 찾아 먹기도 했다.
김치 없이는 살지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김치는 옛날부터 훌륭한 약이었는데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실제로 나박김치를 전염병 예방과 치료약으로 처방하기도 했다.
조선 중종 때인 1524년, 평안도 용천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그 해 사망자만 670명에 이르렀는데 엄청나게 많은 숫자이기도 하지만 당시 이웃 지방의 인구가 1,200명 정도였다고 하니까 속된 말로 지역 전체가 전염병으로 쑥대밭이 됐다. 이로 인해 평양감사가 문책 당하고 조정이 발칵 뒤집혔는데 이때 전염병 예방과 치료에 쓰였던 약이 나박김치였다.
이듬해 중종은 지난해 나돌았던 전염병이 다시 퍼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방역조치를 펴는 한편 의관인 김순몽과 박세거를 시켜 ‘간이벽온방’이라는 의학서를 펴냈다. 간이벽온방은 한문을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도 읽어야 했기에 순 우리말로도 적었는데 여기에 전염병 예방을 위해 순무로 담근 나박김치 국물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한 사발씩 마시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얼핏 전염병 막는다며 나박김치 국물을 마시라고 한 것을 옛날 사람들의 근거 없는 민간요법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음식과 약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음식동원의 관점에서 보면 무는 채소 중에서도 가장 이로운 작물이고 소변을 다스려 허해진 기운을 보충한다고 했으니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에서 환자 기력을 보충해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데 도움이 됐을 수도 있다.
약 사먹을 돈도 없고 제대로 치료할 여력이 없는 힘없는 백성들만 나박김치를 먹으며 전염병을 예방했던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도 몸이 불편하면 김칫국물을 마셨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시대 최장수의 영예를 누린 영조 임금이다.
영조는 소화불량 때문이었는지 음식을 잘 들지 못했고 그래서 언제나 식욕이 없었기에 내의원에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영조가 식욕이 떨어졌을 때 입맛을 되찾게 해주는 음식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김칫국물도 그중 하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식욕을 잃었을 때는 생선 중에서는 조기를 즐겨 들었고 혹은 고추장이나 김칫국물로 입맛을 되찾았다고 나온다. 영조 무렵이면 지금과 같은 배추김치는 아직 널리 퍼지기 전이었으니 아마 무로 담근 나박김치 종류가 아니었을까 싶다.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 때문에 나라가 불안하다. 이럴 때일수록 김치에 밥 한 그릇 뚝딱 먹고 활기차게 생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예방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