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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배송 경쟁의 그림자

  • 2019.03.25(월) 11:01

배송 속도 올리기 경쟁…치킨게임 될라

빠른배송, 로켓배송, 당일배송, 새벽배송, 3시간 배송, 30분 배송.

요즘 유통업계의 화두는 단연 '배송'입니다. 고객의 집 앞까지 누가 더 빠르게 주문 상품을 가져다 놓느냐가 가장 중요한 과제인 듯합니다. 과거에는 의류나 잡화, 전자제품 등 공산품이 위주였다면 최근엔 농산물 등 신선식품 배송이 늘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과거엔 주문 상품이 2~3일 만에 도착하면 '빠른 배송'으로 여겨졌는데 이후 다음 날 바로 배송해주는 '익일배송', '로켓배송'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당일배송'이나 주문 다음날 새벽에 가져다주는 '새벽배송'까지 나왔죠. 경쟁이 치열해지자 일부 업체들은 '3시간 배송'이나 '30분 배송' 등 점점 시간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습니다. 공산품뿐만 아니라 신선식품까지 빠르게 배송해주니 굳이 장을 보러 가지 않아도 됩니다. 침대에 누워서 혹은 소파에 앉아서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3시간 안에, 늦어도(?) 다음날 새벽에 가져다주니 참 좋은 세상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이죠.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이렇게 빠른 배송이 가능해진 걸까요. 점점 더 빨라지기만 한 배송에 부작용은 없을까요.

◇ 쿠팡 상징이던 '쿠팡맨'…"노동 조건 개선하라" 

유통업체들이 상품을 배송하려면 크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바로 물류 창고와 배송 인력입니다. 특히 빠른 배송을 위해선 신속하게 물류 창고 속 상품을 찾아 포장까지 하는 '시스템'이 필요할 거고요. 배송 인력의 경우 더 많을수록 좋을 겁니다.

먼저 배송 인력을 살펴볼까요. 온라인 쇼핑시장의 성장으로 배송 물량은 급증하고 있습니다. 반면 배송 인력은 물량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서 부작용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로켓배송으로 '빠른 배송' 경쟁의 불을 댕겼던 쿠팡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쿠팡의 배송 직원인 '쿠팡맨'은 5년 전쯤 배송시장에 등장하자마자 친절한 서비스로 주목받으며 업계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단순히 물건을 배송해주는 차원을 넘어 간단한 손편지를 써주거나 감동적인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과거 배송기사들과 차별화한 서비스를 보여줬습니다. 쿠팡맨은 쿠팡의 상징으로 통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 쿠팡맨이 친절했던 건 하루 배송 물량이 50~60개 정도에 불과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루에 250개 안팎의 물량을 소화해야 해 과거와 같은 세심한 서비스를 기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쿠팡은 지난 2015년까지만 해도 쿠팡맨을 1만 5000명까지 확충한다고 호언장담했는데요. 지금은 이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쿠팡맨을 '상시 채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워낙 관두는 사람이 많은 탓입니다. 현재 쿠팡맨은 4000명 정도인데요. 평균 근속 기간은 2년 미만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점점 일이 힘들어지다 보니 '버티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입니다.

급기야 쿠팡맨들은 노조를 만들어 쿠팡을 상대로 '투쟁'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노동조건 개선과 열악한 처우, 정규직 전환 확대 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급증하는 물량을 점점 더 빠르게 배송해야 하는 경쟁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는 국내 1위 택배회사인 CJ대한통운의 한 물류터미널에서 연달아 사고가 나기도 했습니다. 안전관리 허술과 밤샘 작업 등이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허술한 안전관리로 인한 사고는 CJ대한통운뿐만 아니라 택배시장 전반에 잠재해있다는 지적이 많은데요.  이 역시 새벽배송, 빠른배송이 낳은 부작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지적들이 이어지자 무조건 빨라야 한다는 목표에 제동을 거는 분위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롯데마트의 경우 지난해 말 '30분 배송'을 선보이겠다고 공언해 주목받았는데요. 그러나 배송 인력의 안전 문제 등이 지적되면서 내부 검토에 들어갔고, 그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습니다. 롯데마트 측은 기존보다 더 빠른 배송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는 건 맞지만 배송 시간을 '30분'이라고 못 박는 것엔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입니다.

◇ 물류시스템 등에 대규모 투자…지속 가능할까

최근 유통업체들은 너도나도 '물류 시스템'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데요. 주문 상품을 찾고 이를 포장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업체들은 상품 분류 로봇이나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을 활용한 수요 예측 및 재고 관리시스템 등 '최신기술'도 속속 도입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여러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효율적인 물류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가 적정한지에 대해선 고민이 필요해보입니다. 내수시장은 한정돼 있는데 국내 기업들은 무작정 엄청난 금액을 물류시스템에 투자하느라 정작 수익은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범석(오른쪽) 쿠팡 대표와 손정의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이 지난해 11월 2조 2000억원의 투자 결정 이후 도쿄에 위치한 소프트뱅크 그룹 본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쿠팡 제공)

실제로 국내 온라인 유통업체들 대부분 수년간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내 새벽배송 시장의 문을 열었던 마켓컬리의 경우 지난 2015년 식재료 전문서비스를 선보인 이후 연평균 300%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영업이익을 낸 적은 없습니다. 국내 대표 이커머스 기업인 쿠팡이나 위메프, 티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끝없는 속도 경쟁에 빠지게 되면 자칫 치킨게임 양상으로 흐를 우려도 있습니다. 경쟁자가 쓰러질 때까지 무작정 돈을 쏟아붓는 방식은 국내 유통산업의 미래에도 좋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 많습니다.

이 밖에도 최근 신선식품 배송이 늘면서 과대 포장으로 인한 환경 문제도 도마에 오르고 있는데요. 비닐 포장뿐만 아니라 스티로폼, 은박보냉팩, '뽁뽁이'로 불리는 에어캡 등의 일회용품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업체들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속도 경쟁' 탓에 당장은 돌아볼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

한 이커머스 업체 관계자는 "과거에도 과대포장으로 인한 환경 문제가 논란이 됐지만 포장을 점차 줄이면서 해결한 바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을 빠르고 안전하게 고객에게 드리는 것"이라며 "당장은 어렵겠지만 신선식품 배송으로 인한 포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국내 배송 시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관련 산업이 발전하고, 소비자의 편의성이 높아지는 등 긍정적인 면도 많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변화들이 지속 가능한가에 대해선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당장 눈앞의 경쟁에만 치중하다 보면 온갖 부작용을 낳게 되고, 결국 산업 전반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는 점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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