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통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던 대형마트의 몰락이 현실화되고 있다. 대형마트들은 이제 온라인에 그 자리를 뺏겼다. 소비 트렌드 변화와 함께 정부의 낡고 정치적인 규제가 맞물린 결과다. 특히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취지로 강제한 유통 규제들은 대형마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당초 목표였던 전통시장을 살리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내수 활성화에 기여한 것도 아니다. 지난 8년간 대형마트들의 족쇄로 작용한 유통 규제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향후 대책을 고민해보려 한다. [편집자]
현재 국내 유통산업의 대세는 온라인이다. 오프라인 매장만 찾던 소비자들은 빠르게 온라인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금껏 소비자들에게 물품 구매를 위해 매장을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굳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원하는 물건을 더 싸고 빠르게 받아볼 수 있다. 이것이 온라인의 힘이다.
온라인이 급부상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형마트 규제다. 정부는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를 옥좼다. 반면 온라인엔 관대했다. 대형마트를 잡으면 전통시장이 살아날 줄 알았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정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문제는 이 규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 대형마트는 '적(敵)'이었다
2012년 제정된 '유통산업 발전법'은 대표적인 포퓰리즘 법안으로 통한다. 당시 정부와 정치권이 전통시장을 살리겠다며 만든 법이다. 다분히 정치적 계산이 깔린 법안이었다. 법안의 명칭은 유통산업 발전법이지만 내용은 '대형마트 규제법'이다.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제한(오전 0~10시)과 함께 의무 휴무일 지정(공휴일 중 매월 2회) 등이 주된 내용이다.
유통산업 발전법은 '대기업=적(敵)'이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대기업이 막대한 자본과 구매력을 바탕으로 전통시장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핵심이다. 더불어 당시 강조됐던 사회적 가치인 '상생'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와 정치권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대기업이 대형마트를 앞세워 서민들의 터전인 전통시장을 붕괴시키고 있다고 봤다.
대형마트는 주로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어서다. 특히 구매력을 앞세운 대량 매입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여기에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을 적기에 공급하려면 유통 구조의 효율화가 필수적이다. 물류 창고는 물론 신선식품의 경우 자체적인 세척, 보관 기술 등에 대한 투자도 따라줘야 한다. 대기업이 아니면 버텨내기 힘든 사업이다.
유통산업 발전법은 대기업의 이런 투자와 노력은 외면했다. 서민들이 이용하는 전통시장이 죽어가고 있는 이유를 오로지 대형마트 탓으로만 돌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가 편해서다. 전통시장은 선(善)이고 대형마트는 악(惡)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악인 대형마트만 규제하면 전통시장은 당연히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단순하면서도 위험한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 생각지도 못한 '온라인'만 키웠다
유통산업 발전법은 계속 진화했다. 19대 국회에서 65건, 20대에서 42건의 유통산업 발전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규제는 계속 추가됐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들은 묵살되기 일쑤였다. 결국 대형마트는 죽어갔다. 그들이 살리겠다고 나섰던 전통시장도 큰 변화는 없었다. 대신 대형마트의 자리를 온라인이 차지했다. 정부도, 정치권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실제로 통계청이 발표한 업태별 소매 판매액을 살펴보면 2015년 46조원이던 온라인의 소매 판매액은 작년 80조원으로 성장했다. 반면 대형마트의 경우 2015년 33조 원에서 작년 32조원으로 성장이 정체됐다. 유통산업 발전법이 당초 계획했던 대형마트 죽이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전통시장이 아닌 온라인이 성장하면서 유통산업 발전법의 취지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정부의 규제로 대형마트가 침체일로를 걷는 동안 온라인 유통업체들은 급성장했다. 쿠팡, 마켓컬리 등이 대표적이다. 더 이상 대형마트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대기업들도 일제히 온라인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앞서가있는 온라인 유통업체들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롯데, 신세계 등 대형마트를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여전히 온라인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대형마트들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도 온라인 유통업체와 같은 서비스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부의 규제가 발목을 잡았다. 대형마트의 경우 의무휴업일에는 온라인 배송을 금지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의 핵심은 배송이다. 온라인 유통 체들은 로켓배송, 새벽배송으로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대형마트들은 이마저도 손발이 묶여 버렸다. 제대로 된 경쟁은커녕 출발선상에도 서지 못했다.
◇ 더욱 기울어지는 운동장
일각에선 대형마트를 옥죄고 있는 유통 규제를 한시적으로나마 풀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대형마트 의무 휴업일 온라인 배송 허용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당장 생필품 구입이 어려운 계층들을 위해서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자체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청와대도 나섰지만 지자체가 거부했다. 유통산업 발전법상 영업 제한과 의무휴업일 지정 권한은 지자체에 법정 위임돼있다.
지자체들은 "지역 상생과 법안 취지를 훼손한다"라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돼 있다는 방증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이미 온라인 쇼핑업체들도 과부하가 걸렸다. 정상적인 배송이 어렵다. '한시적'으로라도 대형마트가 가진 유통망과 배송시스템을 활용한다면 소비자들의 불편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지자체들은 주저한다. 공고했던 규제의 둑이 터질까 두려워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계산도 깔려있다.
업계에선 유통산업 발전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정부와 정치권이 현장의 상황은 전혀 모른 채 탁상공론으로 만들어낸 전형적인 낡은 규제라는 지적이다. 소비자들이 전통시장을 가지 않는 것은 주차가 불편하고 카드 사용이 어려워서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점들은 전혀 고려치 않았다. 업계 관계자는 "현장 상황은 외면하고 단순히 대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한쪽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상생이 진정한 상생인지 묻고 싶다"라고 지적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한시적이나마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온라인 배송 허용을 기대했는데 무산돼 정말 암담하다"면서 "규제의 목적이던 전통시장 살리기는 이미 실패한 것 아니냐. 그럼에도 왜 아직도 규제에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대형마트 관계자는 "상생에 막혀 최근 2년간 신규 출점을 위한 삽조차 꽂아보지도 못했다"면서 "손발 다 묶어놓고 일자리와 투자를 늘리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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