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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한끗]②진로 '두꺼비', '학' 잡은 사연

  • 2021.10.12(화) 14:30

'흑국·유리병' 등 차별화로 판매 확대
목포 소주 '삼학'의 질주…경쟁 심화
'삼학' 몰락으로 소주 시장 패권 장악

/그래픽=비즈니스워치

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서 사랑받고 있는 많은 제품들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그 한 끗 차이가 제품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비즈니스워치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에 숨겨져 있는 그 한 끗을 알아봤습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함께 찾아보시죠. [편집자]

진로, 소주를 '유리병'에 담다

앞서 설명드렸던 것처럼 진로 소주는 1924년 탄생합니다. 당시 황해도 보통학교 조선어 선생님이었던 장학엽 씨가 동업자 두 명과 함께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합니다. 1924년 당시만 해도 전국에 양조장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기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양조장 수가 10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쉽게 술을 만들어 팔 수 있었던 만큼 경쟁이 치열했죠.

진천양조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나름 선방합니다. 매년 매출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진천양조와 같은 소규모 양조장은 일본 자본을 등에 업은 대규모 양조장에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1919년 평양에 일본 자본에 의해 대형 기계식 양조장이 생긴 이후 전국에는 대규모 자본을 앞세운 양조장들이 생겨납니다. 이들과의 경쟁에서 진천양조는 참패합니다.

1919년 인천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기계식 소주 대량 생산공장인 조일양조주식회사 전경. 당시 이곳에서는 현재 우리가 마시는 소주와 같은 '희석식 소주'를 생산했다. /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고전하던 장 대표는 결국 파산합니다. 이후 장 대표는 고생 끝에 다시 일어섭니다. 그때 그는 승부수를 띄웁니다. 당시 조선에 대규모로 유통되던 소주는 대부분 '희석식 소주'였습니다. 반면 그는 이들과 차별화를 위해 '증류식 소주'를 고집합니다. 대량생산을 위해 검은 누룩인 '흑국(黑麴)'을 사용해 소주를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칩니다. 당시 일본 양조장에서 생산하던 소주는 '단맛', 진로는 '쓴맛'을 강조했습니다.

차별화 전략이 성공을 거두면서 진로는 승승장구합니다. 이 여세를 몰아 진로는 새로운 시도에 나섭니다. 당시 소주는 전통적인 계량방식인 홉, 되로 판매됐습니다. 하지만 진로는 국내 최초로 소주를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생산은 물론 출고, 관리가 편리해졌죠. 유리병에 담긴 진로는 날개 돋친 듯 팔립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진로는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습니다.

강력한 경쟁자 '삼학'의 등장

한국전쟁 발발은 진로에게 큰 시련이었습니다. 전쟁통에 모든 것을 두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던 거죠. 부산에 정착한 장 대표는 다시 소주 사업에 나섭니다. 소주에 사활을 건 겁니다. 그는 부산에서 동업을 했지만 다시 좌절합니다. 휴전 이후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신길동에 '서광주조'를 세웁니다. 이때 진로의 원숭이가 두꺼비로 바뀌게 됩니다.

서울에서 다시 진로 소주를 제조, 판매했지만 인지도는 미약했습니다. 장 대표는 밤잠을 설쳐가며 진로 소주 인지도 높이기에 나섭니다. 길거리와 시장을 누볐고 도매상들을 찾아다니면서 진로 소주를 알리는데 전력을 다 합니다. 진로 소주가 마케팅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마 이때부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장 대표의 노력 덕분이었을까요? 진로 소주는 서울을 중심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1954년 3월 2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서광주조 시절의 진로 광고 /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하지만 진로에게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목포를 기반으로 한 삼학양조의 '삼학소주'입니다. 삼학양조는 1947년에 설립된 업체입니다. 삼학은 목포의 삼학도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만큼 지역색이 짙었습니다. 삼학양조는 원래 소주를 생산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주정과 청주(淸酒)만 다뤘죠. 주력 상품도 청주였습니다. 이 청주의 품질이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학소주가 급성장한 데에는 정부의 정책이 컸습니다. 1965년 당시 박정희 정부는 '양곡관리법'을 시행합니다. 전국적으로 쌀 부족 현상이 지속되자 쌀로 술을 만들 수 없도록 한 겁니다. 그때만 해도 국내 소주 시장은 쌀을 활용한 증류주 시장이 대세였습니다. 양조업체들은 핵폭탄을 맞은 셈입니다. 이때 삼학소주는 재빨리 움직입니다.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소주 시장에 본격 진출합니다.

소주 시장 패권을 쥐다

양조업체들은 '희석식 소주'로 갈아탑니다. 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석식 소주는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타서 만듭니다. 주정은 값싼 재료들이 사용됩니다. 50년대에는 설탕의 부산물인 당밀이, 60년대에는 고구마가 사용됐고 현재는 타피오카에 일부 쌀, 보리, 고구마 등을 사용합니다. 이를 발효시켜 연속적으로 증류하면 순도 95~96%의 순수 알코올을 얻습니다. 여기에 물을 섞어 알코올 도수를 희석시키는 겁니다.

희석식 소주의 장점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또 가격도 증류식 소주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현재 우리가 마시고 있는 소주는 대부분 희석식 소주입니다. 어쨌든 삼학양조는 희석식 소주를 채택, 서울에 대량 생산 시설을 구축합니다. 이후 시장을 빠르게 선점해 마침내 업계 1위를 차지하죠. 당시 삼학소주의 시장 점유율은 40%에 달했을 정도였습니다.

1965년 2월 1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삼학소주 광고 /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진로에게 삼학의 등장은 큰 위기였습니다. 삼학소주의 질주는 계속됐습니다. 1966년 진로주조로 이름을 바꾼 진로는 삼학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진로에게 기회가 옵니다. 1971년 삼학양조는 '납세증지 위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습니다. 당시 소주 뚜껑에는 세금을 냈다는 확인의 일환으로 띠로 된 종이를 붙였습니다. 삼학양조가 이를 위조해 탈세를 했다는 혐의를 받은 겁니다.

검찰 수사 후 삼학양조는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한때 국내 소주 시장을 호령했던 삼학양조는 결국 1973년 최종 부도 처리 됩니다. 당시 세간에는 목포 기반의 삼학양조가 야권 대선 주자인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댔던 것이 검찰 수사의 빌미가 됐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어찌 됐건 삼학소주의 몰락은 진로소주에겐 기회였습니다. 이후 진로소주는 국내 소주 시장을 평정합니다.

진로 소주는 국내 소주 시장 패권을 쥐기 위해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마케팅 기법을 선보입니다. 진로 소주의 마케팅은 매우 혁신적이고 앞서나갔던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 일각에서는 '마케팅 교과서'라고까지 부릅니다. 다음 편에서는 진로 소주의 기발했던 마케팅에 대해 알려드릴까 합니다. 놓치지 마세요.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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