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여름이면 하이트진로가 공개하는 지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 순위'입니다. 하이트진로가 직접 조사를 하는 것은 아니고, 영국의 주류 전문 매체인 '드링크 인터내셔널'이 매년 주류 판매량을 조사해 순위를 매기면 이를 인용하는 겁니다. 자체적으로 기준을 세워 적당히 "이게 1등"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 판매량을 리터 단위로 조사해 나열하는 만큼 신뢰도가 높다고 할 수 있겠죠.
보통 증류주(spirits)라고 하면 곡물이나 과일 등을 증류해 만든, 도수가 높은 술을 의미하는데요. 도수가 40도를 오가고 독한, 가격대도 상대적으로 높은 술들이죠.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럼, 진, 고량주 등이 이에 속합니다. 우리가 '독하고 비싼 술' 하면 떠오르는 제품들을 생각하면 얼추 맞습니다.
하이트진로가 이를 꾸준히 인용하는 이유는 뭘까요. 당연히 우수한 성적을 거뒀기 때문입니다. 하이트진로와 드링크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하이트진로의 '진로(jinro)'는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21년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증류주 타이틀을 지켜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로'는 우리가 요즘 즐겨 마시는 투명한 병의 '진로이즈백(JINRO is Back)'이 아니라 하이트진로가 판매하는 소주를 통칭합니다. 하이트진로는 브랜드 통일성과 해외 소비자 접근성 향상을 위해 소주의 브랜드를 'jinro'로 통일하고 있거든요. 아무튼간에 이름만 대도 전세계인이 다 아는 잭다니엘, 스미노프, 바카디, 앱솔루트 등을 제치고 진로가 1위라니 정말 대단하죠.
그런데 소주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라니, 진짜일까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 사람들이 소주를 유독 많이 마시기도 하고 소주가 요즘 동남아시아 등 해외에서도 잘 나간다고도 들었지만요. 그래서 자세한 내용을 한 번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해당 발표의 순위 기준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판매량(리터)입니다. 정확히는 9리터 케이스의 판매량(박스)인데요. 진로는 지난해 총 9450만 박스를 기록했습니다. 이를 리터로 환산하면 약 8억5000만 리터가 됩니다. 국내에서 소주는 주로 360㎖ 병으로 팔리는데 이를 기준으로 하면 23억6000만병 정도가 나오네요. 실제로 참이슬은 연간 20억병 이상이 팔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통계치가 거의 정확한 셈입니다.
물론 소주는 아주 저렴한 술입니다. 용량당 가격이 저렴한 만큼 많이 팔린 것처럼 보이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올 법합니다. 우리가 대형마트나 바 등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앱솔루트같은 보드카는 750㎖ 한 병에 3만원을 웃돌죠. 연산에 따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위스키, 브랜디류는 말할 것도 없구요. 반면 소주는 750㎖(약 2병)로 환산해도 2000원대죠. 판매량 단위로 순위를 매길 때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실제 순위권에 오른 증류주 브랜드 중 대부분이 저렴한 로컬 브랜드였습니다. 2위인 지네브라 산 미구엘은 필리핀의 국민 소주라고 불리는 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필리핀 맥주 산 미구엘을 만든 산 미구엘에서 나온 진이죠. 도수는 소주의 2배가 넘는 40도지만 가격은 아주 저렴합니다. 350㎖ 병이 60~70페소로, 한화 약 1600원 안팎이거든요.
3위를 차지한 인도의 '맥도웰스 넘버원' 위스키 역시 위스키임에도 가격이 750㎖ 기준 1만원 이하에 구매할 수 있는 저가 주류입니다. 이하 다른 순위권 증류주들 역시 '고급'이라기보단 대중성 있는 브랜드이거나 저렴한 로컬 브랜드에 해당합니다. 주당들에겐 역시 '질보다 양'입니다.
물론 진로가 그 중에도 특별하게 저렴한 건 맞습니다. 당장 2위 지네브라 산 미구엘만 해도 병당 가격은 비슷하지만 도수가 2배죠. 다른 증류주들 역시 도수가 35~42도에 달하는 고도수 주류입니다. 용량당 가격도 저렴한데 도수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만큼 더 마실 수 있어 판매량도 늘어났다는 겁니다.
진로가 최근 동남아시아 등을 중심으로 '~에 이슬' 시리즈를 확대하는 등 저도수 주류 시장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시장 트렌드가 마시기 편한 저도수 주류로 넘어오고 있다는 계산입니다. 실제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1억200만 달러의 사상 최대 수출 실적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저도주 트렌드에 맞춰 아시아 지역 과일리큐르 성장세에 모멘텀을 강화한 것이 주효했다는 평가입니다. 외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10도 후반~20도대 증류주라는 포지션이 장점으로 작용한 셈입니다.
진로의 1위 소식을 전할 때마다 들리는 또 하나의 지적이 있습니다. 진로(참이슬)가 증류주가 맞냐는 겁니다. 안동소주 같은 전통소주면 몰라도 참이슬, 처음처럼 같은 희석식 소주를 위스키, 브랜디와 같은 증류주 카테고리에 넣을 수는 없다는 거죠.
실제로 소주를 증류주(spirits) 카테고리에 넣지 않는 조사 결과도 꽤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국제보건기구(WHO)가 발표하는 국가별 1인당 음주량 통계가 있는데요. 이 자료에서 WHO는 15세 이상 한국인의 1인당 음주량을 7.74리터로 계산했습니다. 이 중 1.72리터가 맥주였고 증류주는 0.22리터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기타 주류(other alcoholic)'는 무려 5.66리터에 달했죠. 희석식 소주를 기타 주류에 포함한 겁니다.
이에 대해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서 스피릿이라고 하면 40도 안팎의 고도주가 일반적이라서 20도 전후의 소주를 스피릿으로 분류하지 않은 것 같다"고 추론했습니다.
다만 제조법을 보면 소주를 증류주로 분류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같은 20도 안팎의 소주는 안동소주 등 전통소주와 구분해 '희석식 소주'라고 부르는데요. 타피오카나 카사바 등의 전분 원료를 연속증류해 95%짜리 알코올을 만든 후 여기에 물과 감미료를 섞어 만드는 게 희석식 소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증류 과정'입니다. 증류를 통해 만드는 술인 만큼 증류주로 분류되는 게 맞다는 거죠. 사실 보드카나 일부 위스키류도 연속증류를 통해 만듭니다. "연속증류를 했기 때문에 소주는 맛이 없다"는 주장은 개인의 취향이라 볼 수 있지만 "증류주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참이 아닌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주에 유독 비판적인 건 그만큼 소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 됐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는 외국인들도 한국을 찾으면 당연하다는 듯 삼겹살에 '소주'를 찾습니다. 소주만의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