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제철과 동부CNI가 일단 한고비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과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이 동부화재 지분을 두고 본격적인 줄다리기에 들어갔다.
김 회장 측은 금융 계열사가 걸린 동부화재 지분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여차하면 이미 만신창이가 된 비금융 계열사는 포기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반면, 동부그룹의 부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채권단은 이 지분을 정조준하면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 측이 동부화재 지분을 끝까지 고집하면 사실 채권단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별로 없다. 다만, 비금융 계열사가 무너지면 이미 여러 금융회사에 담보로 잡힌 동부화재 지분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양측간 팽팽한 수 싸움이 예상된다.
◇ 동부제철은 자율협약으로 고비 넘겨
이달 초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면서 유동성 위기로 내몰린 동부제철과 동부CNI는 일단 한숨을 돌릴 전망이다. 우선 동양제철은 워크아웃을 모면하고 자율협약에 들어간다. 우선변제권을 요구하면서 한때 반대했던 신용보증기금이 돌아선 덕분이다.
채권단은 우선 5일 700억 원을 비롯해 7∼8월 중 만기가 돌아오는 동부제철 회사채 1100억 원에 대한 차환 발행을 지원할 예정이다. 이후 실사를 거쳐 동부제철 측과 경영 정상화 약정을 맺게 된다. 이 과정에서 출자전환과 감자 등이 이뤄지면 김 회장이 경영권을 잃을 수도 있다.
5일과 12일 총 500억 원의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는 동부CNI도 고비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동부CNI는 안산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부족한 자금은 채권단의 지원을 받아 회사채를 갚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한고비 넘겼지만 앞날은 여전히 험난
동부제철에 이어 동부CNI가 무사히 위기를 넘기더라도, 앞날은 여전히 험난하다. 동부그룹 64개 계열사의 차입금 규모는 모두 5조 7000억 원, 특히 동부제철과 동부CNI, 동부메탈, 동부건설, 동부팜한농 등 요주의 계열사가 연내 갚아야 할 빚만 4244억 원에 달한다.
문제는 동부그룹이 현재 스스로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동부제철 인천공장과 동부당진발전 패키지 매각이 실패하는 등 자구노력에 차질이 생긴 탓에 이젠 채권단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반면 지난해 연말 이후 동부그룹에만 1조 원 넘게 쏟아부은 채권단은 무작정 추가 지원에 나서긴 어렵다. 산업은행 주도의 채권단이 김 회장의 장남 김남호 씨가 가진 동부화재 지분 13.29%를 추가 담보로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남호 씨의 동부화재 지분은 후순위 담보만 가능하다. 이미 대부분 지분이 다른 금융회사에 담보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동부화재 주가가 오른 만큼 담보 가치가 늘었고, 최대주주가 분명하게 책임을 지면 추가 지원에 나설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채권단의 입장이다.
▲ 김남호 씨의 동부화재 지분 담보 제공 현황 |
◇ 동부화재 지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
김 회장 측은 동부화재 지분은 동부증권 등 금융 계열사의 경영권과 직결되는 만큼 담보로 내줄 수 없다고 완강히 버티고 있다. 김 회장이 가진 동부화재 지분 6.93%를 이미 담보로 내준 마당에 남호 씨 지분마저 넘어가면 아예 경영권을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특히 비금융 계열사 지원을 이유로 이미 계열 분리된 금융 계열사 지분까지 요구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지적한다. 약속에도 없고, 법적인 근거도 없는 연좌제라는 논리다.
반면 채권단은 남호 씨가 동부그룹의 실질적 대주주인 만큼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남호 씨가 동부화재 지분을 담보로 빌린 돈을 대부분 비금융 계열사 지원에 썼다는 점에서 계열 분리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기택 KDB산은금융 회장은 1일 한 언론과 만나 남호 씨의 동부화재 지분을 내놓으라고 직접 압박에 나섰다. 홍 회장은 “김 회장은 동부화재에 대한 아들의 지분이 본인과 상관이 없다면서 채권단에 담보 제공을 거부하고 있다. 아들 남호 씨가 자수성가한 사업가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서 동부 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 동부화재 지분은 어디로?
동부화재 지분을 둘러싼 양측의 기 싸움은 더 팽팽해질 전망이다. 이미 자율협약이 결정된 동부제철과는 달리 동부CNI와 동부건설 등 다른 계열사들은 앞으로 채권단의 추가 지원 없이는 생존이 어렵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 과정에서 동부제철 인천공장과 동부당진발전 등 핵심 자산이 얼마나 빨리 팔리느냐가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동부CNI 역시 IT부문을 동부화재에 넘기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런 자산 매각 작업이 속도를 내면 김 회장 측이 다소 시간을 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채권단의 입김이 세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 회장 측이 끝까지 버티면 채권단이 강제할 방법은 없다. 최악에는 비금융 부문을 아예 포기하고, 꼬리 자르기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비금융 계열사가 무너지면 남호 씨의 동부화재 지분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많다. 이 지분을 담보로 빌린 돈이 비금융 계열사 지원에 들어간 만큼 해당 금융회사들이 담보권 행사에 나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비금융 계열사가 무너지면 채권단은 물론 김 회장 일가의 피해도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면서 “추가 지원 과정에서 동부화재 지분을 둘러싼 팽팽한 기싸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