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계가 금융소비자들의 민원을 가장 많이 발생시킨다는 '민원왕' 오명을 벗기가 어려워졌다. 감독당국이 금융소비자보호 실태평가(이하 실태평가) 종합개선방안의 핵심으로 추진하던 '민원건수 감경·가중평가 적용'이 백지화되면서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하반기 보험사를 비롯해 전 금융권을 대상으로 실태평가 개선을 위한 의견수렴을 진행했다. 소비자가 실태평가를 참고해 금융사를 선택할 수 있는 변별력을 높이는 한편 불합리한 평가기준은 업계 의견을 수용해 개선하기 위함이다.
개선방안의 핵심은 민원건수에 대한 감경·가중평가를 적용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금감원은 별도 태스크포스팀까지 구성했었다.
태스크포스팀 가동결과 금감원은 업계 의견 등을 반영해 '금융사 귀책사유가 없는 민원을 평가에서 제외하고 자율조정한 민원에 대해서는 1건을 4분의 1건으로 감경하는 안'을 검토해왔다. 그 대신 '불완전판매 등 주요 영업행위 법규를 위반한 민원의 경우 1건을 2건으로 가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단순민원은 민원건수에서 제외해주되 보험사 잘못이 명확한 민원은 민원건수를 가중해 제재 실효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보험업계는 어려운 상품내용과 용어, 약관, 소비자와의 정보 비대칭 문제로 금융권 가운데 민원이 가장 많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따라 업계는 그동안 과실여부에 따라 민원건수를 적용해달라고 지속적으로 건의해왔다. 내용이 어려워 단순 질의한 것까지 모두 민원으로 잡히는 등의 문제가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금감원 태스크포스가 검토해온 민원건수 평가 조정방안이 적용될 경우 민원 규모를 큰폭으로 감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당분간 민원왕 자리를 내놓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금감원은 민원건수 감경·가중평가의 경우 귀책사유 여부를 판단하기 전 입력과정에서 객관성이 결여될 수 있고 기준이 모호할 수 있는 부분들을 우려해 당장 반영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 관계자는 "종합개선안은 민원건수 감경·가중평가가 핵심사안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지만 반년동안 시스템을 통해 데이터를 축적한 결과 담당자에 따라 입력기준이 다르거나 사실관계 여부를 확정할 수 없는 건 등 입력의 오류가 많다"며 "귀책사유 분류도 민원 담당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금감원) 내부적으로도 고민이 많은 상태"라고 말했다
다만 당장 시행은 어렵더라도 지속적인 데이터 집적과 시스템 개선을 통해 적용방안을 계속 고민하겠다는 방침이다.
◇ 생보-손보 이해관계 엇갈린 것도 한몫
이같은 금감원의 결정에는 보험업계 내에서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 입장이 갈린 것도 한몫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생보사와 손보사 이해관계가 엇갈렸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그동안 손보사가 생보사에 비해 연간 대략 10% 가량 민원건수가 많았던 것으로 집계돼 왔다. 손보사가 민원이 많은 자동차보험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생보업계를 뜨겁게 만들었던 즉시연금 미지급 이슈로 인해 민원이 급증한 생보업계가 민원건수 개선방안에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생보업계 관계자는 "생보 민원중 상당건이 가중평가 대상에 해당할 수 있고 감경요소에는 엄격한 기준이 적용돼 생보사에 특히 불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며 "민원유형 분류 등 민원접수와 처리 과정에서 직원별로 편차가 발생하고 시스템 및 프로세스 불안정성으로 인해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 전면 재검토를 요청했다"고 전했다.
생보업계는 특히 즉시연금에 대한 사실조회 통보건, 단순 이첩건 등은 제외해야 하고, 금감원이 즉시연금 가입자의 청구권 소멸시효 중지를 위해 즉시연금 전용 민원접수 코너를 만들어 접수를 독려한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늘어난 것이 아닌 만큼 민원건수 평가에 넣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민원건수 산정기준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금감원은 생보업계 의견을 수용해 지난해 9월부터 금감원의 전용코너를 통해 접수된 즉시연금 민원은 2018년 실태평가 대상(2019년 발표)에서 제외하기로 했고, 같은 기간 보험사에 접수된 민원만 넣기로 했다.
민원건수는 차후 보험사 경영실태평가에 반영되는 만큼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지표다. 더구나 금감원이 금융 소비자보호를 업무 우선순위로 두면서 보험의 고질적 문제인 민원관리가 경영 화두로 떠오른 상태다.
손보업계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생보업계는 즉시연금 민원 과다 우려를 덜었지만 이 때문에 보험업계 전체 민원건수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주장이다. 손보업계에서는 "즉시연금 불똥이 튀어 소를 얻고 대를 잃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손보업계 한 고위 관계자는 "보험권에 민원문제가 고질적으로 이어져 온 만큼 민원건수 감경방안을 지속적으로 감독당국에 건의해 왔고 이번 실태평가에서 반영되길 기대했다"며 "(보험업계 전체로 보면) 즉시연금과 관련된 이슈보다는 민원에 대해 과실여부를 따져 민원건수에 반영하는 부분이 큰 이슈인데 이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업계 불만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생보업계 내에서도 아쉽다는 반응이 나온다. 생보업계 관계자는 "즉시연금은 작년, 올해 등 1회성 요인이며 즉시연금을 많이 판매한 곳은 대부분 덩치가 큰 대형사들"이라며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 금융사의 귀책사유가 없는 민원 건수에 대한 감경 부분의 영향이 더 큰데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금감원은 조만간 실태평가 종합개선 방안을 각 금융사에 전달하고 오는 3월초부터 직접 평가에 나설 방침이다. 기존 절대평가 방식을 상대평가로 전환하고 회사별로 총 5등급(우수·양호·보통·미흡·취약)의 종합등급을 매겨 소비자들이 비교하기 쉽게 하도록 할 방침이다. 또 자율점검을 비롯해 자율처리 및 조정 민원건에 대한 평가기준을 강화하고 비대면 영업방식에 맞춰 평가매뉴얼을 조정하는 것이 골자다.